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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May 10. 2021

겉모습, 속사람


겉으로 보면 차가운 사람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러우세요.


첫 책을 내고 여기저기에서 북 토크 행사를 할 때마다 사람들은 내게 이런 인사를 남겨주었다. 그동안 온라인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물었던 서점 관계자들도, 건조한 단문으로 써내려간 책을 읽은 독자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혼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중년 남자라는 선입견도 작용한 것 같다.


아무튼 그런 반응을 접할 때마다 기존의 ‘내’가 사라지는 듯한 경험을 했다. 책을 만들거나 강의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만 생각했지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반복해서 들으며 ‘나는 어떻게 비치나’라고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오늘날 ‘겉으로 보면’이란 말은 ‘SNS에서 보이는 모습으로는’이라는 말이 아닐까 라는 생각. 서점 관계자들도, 독자들도,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이 바라본 나의 ‘겉’모습은 SNS 속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SNS에서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내가 생각한, 아니 내가 ‘의도’한 모습대로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쳐지는 건 아닐까. 겉으로 보기에, 아니 SNS로 보기에 ‘이런’ 사람처럼 보여도 SNS는 인생의 물음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실시간으로(timeline) 흐를 것이다. 우리는 SNS를 통해 타인의 모습을 살피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여기지만 헛된 바람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삶과 SNS는 다르다. 삶은 실존이지만 SNS는 이렇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물론 그 간극이 터무니없이 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SNS로 연출해도 나를 아는 오프라인 지인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니까. 제아무리 연출해도 이 좁은 땅에서의 일상은 거기에서 거기일 테니까. 그럼에도 그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나’는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SNS 활용법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SNS로 자신의 삶을 호소하고, 어떤 사람은 누군가의 삶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으니 ‘나’로부터 시작해 ‘나’에게로 끝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관심도, 타인을 향한 위로도 결국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SNS를 ‘일반적으로’ 운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건강한 정신 상태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오프라인에서 자존감 있는 삶을 위해 노력하는 내가 아는 사람들은 SNS에서도 같은 삶을 펼쳐 보인다. 누군가를 신뢰하기 이전에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은 다소 극단적이다. 소극적인 SNS로 일관하거나 그것을 감추려 오버하거나……. 물론 가장 건강한 사람들은 SNS를 하지 않아도 보통의 삶을 단단하게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인생이 정답은 아니지만 그 답을 SNS로 꾸미지 않는 사람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들이다.


아무튼 인생은 SNS로 파악할 수 없다. 자존감에서 우러나오는 고급 유머를 선사해준 어느 개그우먼의 뜻밖의 비보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생은 ‘쉽게’ 표현되는 통로에 서 있지 않다. 인생의 의미를 좀처럼 찾기 힘든 이유다. SNS가 보여주는 겉모습은 누군가의 삶은커녕 일상의 조각에 불과하다. 그 조각의 크기가 팔로워나 ‘좋아요’ 수에 연동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허상이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슬픔의 비의』라는 산문집에서 눈물이 반드시 뺨에서만 흐르는 것은 아니라고 적었다. 슬픔이 극에 달했을 때 눈물은 말라버리기도 해서 깊은 슬픔 속에서 용기를 내어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눈물이 가슴 속에서 흘러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생을 마감한 ‘그’가 그렇지 않았을까. ‘이 슬픔에 과연 끝은 있을까’라는 비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았을까.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서글픔이 밀려오지 않았을까. 우리만 괜찮다고 여겼을 뿐, 우리만 다르게 보았을 뿐,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


미안하다. 그런 상황에 맞닥뜨려본 적이 없어서 어떤 말도 꺼내기 힘들다. 그래서 속상하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자로 우리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뒤늦은 슬픔이 밀려온다. 우리 모두의 슬픔의 비의일 것이다. RIP.


* 본 글은 개그우먼 박지선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던 날 작성되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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