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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May 05. 2021

적당한 외로움

불교에는 ‘하안거(夏安居)’라는 게 있다. 음력 4월 보름부터 석 달 동안 집중적으로 참선 수행하는 기간을 말한다. 코로나를 겪으며 나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삶의 공간에서 하안거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삶의 처소를 지키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내’한다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어려움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내력(內力)을 갖추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내력이란 무엇일까.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거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야.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야 안전한지 계산하고 또 계산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구조기술사 박동훈이 아니다. “추울 때는 너 자신이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너 자신이 더위가 되라”고 설법하고 싶지만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는 법정 스님은 더더욱 아니다. 추위건 더위건 모두 한때라는 받아들임, 그러니 그 한때를 견디며 다음에 오는 시간을 맞아들임. 받아들임의 의지와 맞아들임의 용기가 사람이 갖춰야 할 내력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세상이 기억하듯이 생전에 법정 스님은 매주 해오던 대중법문을 2003년부터 매년 4월 넷째 주 일요일과 10월 넷째 주 일요일 오전에 길상사에서 나누셨다. 1년에 딱 두 차례, 봄과 가을에만 하셨다. 스님이 봄과 가을에 대중을 불러 모은 건 겨울과 여름이라는 춥고 더운 날을 잘 견뎠다고 격려하기 위해서라고, 호사가들은 입을 놀렸다.


<조선일보>에는 김한수 기자라는 종교 기자가 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미술기자로 같이 활동했던 인연이 있는 분이다. 그분도 내 이름을 기억하리라 믿는다. 2003년 내가 기자에서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일의 경로를 이동할 때 그분은 종교 기자의 자리로 옮겼다. 2003년! 법정 스님이 대중법문을 봄과 가을에만 하기로 결정한 해다. 우연일까. 아무튼 그때부터 나는 그분의 균형을 잃지 않은 종교 기사를 기다리게 되었다. 


아무래도 언론에서 종교인을 찾을 때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때다. 세상이 어수선할 때에도 종교인의 주가는 높아진다. 코로나로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2020년을 정리하며 김한수 기자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고 말한다. ‘법정 스님의 글은 왜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까?’ 그 의문을 해소하고자 스님의 글을 다시 읽다가 이런 답을 얻게 되었다고 정갈하게 적었다.


- 적당한 거리.


스님은 언제나 종단으로부터, 대중으로부터 ‘거리’를 두셨다. 1970년대 유신시절에는 꼿꼿한 글을 쓰다가 자의반타의반 송광사 불일암으로 낙향하셨다. 서울과 거리를 두셨다. 그곳에서 글을 쓰셨다. 사람들이 글에 감복해 남쪽 불일암에 몰려들자 강원도 어느 오두막으로 다시 옮기셨다. ‘어느’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어딘지 모르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곳에서 스님은 수행의 삶을 실천하셨다. 촛불을 켜서 책을 읽고, 채마밭에서 채소를 키워 반찬을 삼으셨다. 김한수 기자는 평생에 걸친 스님의 거리 두기에서 ‘자유’를 발견했다고 적었다. 세상이 돈과 명예의 굴레에 허우적거릴 때 스님은 자유를 ‘스스로’ 만드셨다고 돌아보았다. 스님을 그리워하는 글의 말미에서 기자는 스님과 마지막으로 가진 인터뷰에서 들었던 스님의 육성을 인용한다. 


수행자는 적당한 외로움이 필요하다!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난 스님은 세상 모든 것은 결국 ‘한때’임을 말한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인생의 길을 걷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다. 춥다고 불평하지 말고 덥다고 징징거리지 말아야 한다. 형편이 나아졌다고 우쭐하지 않고 사정이 박하다고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행복도 불행도 모두 내 소관이다. 할 수 없다. 벌이가 되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있는 법이고, 벌이가 되는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는 법이다. 나는 돈 앞에서 ‘점잖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돈이 늘었다고 희희낙락하지 않고, 돈이 줄었다고 울상 짓지 않을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을 팔아서 ‘기부’받은 돈으로 국회의원까지 오른 정치인도 있다지만, 각종 실언에 과태료 상습 체납을 자행해도 장관 자리에 오르는 ‘부동산’ 교수도 있다지만, 나는 내 힘으로 내 돈으로 ‘자립’을 이어갈 것이다. 내 돈으로 와인을 마실 것이며, 돈 앞에서 꼼수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 


『생활의 발견』을 지은 임어당이 “내 마음의 벗”이라며 아꼈던 『유몽영』의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 사람들이 분주하게 몰두하는 일에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세상 사람들이 여유를 갖는 일에 분주히 몰두할 수 있다. 

能閒世人之所忙者, 方能忙世人之所閒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정신적 골격이 허물어진 바이러스 시대를 살고 있다. 상실의 시대. 모두, 힘들었을 것이다. 일상의 발견. 모두, 그리웠을 것이다. 코로나가 강제하는 이 시간을 하안거로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외로움, 거리 두기, 간격을 유지하기. 바이러스가 파생한 외력에 맞서는 내력의 비결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왕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얻은 것보다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는 건 어떨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조용히, 느리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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