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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May 04. 2021

우리는 '우리'를 너무 쉽게 생각해

‘설민석’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렸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역사 왜곡 논란에 이어 대학원 석사 논문 표절 의혹이 불거졌다. 미끼를 문 걸까. 여기저기서 달려들었다. ‘지식 소매상 전성시대’가 불러온 예견된 참사라는 비판부터 그만한 사람은 없다는 옹호론까지. 온라인 공간이 들썩거렸다. 결국 설민석은 “석사 논문을 작성함에 있어 연구를 게을리하고 인용과 각주 표기를 소홀히 했다”며 표절을 인정, 모든 방송에서 하차했다.


세상의 비판은 강의의 오류에 집중되었다. 중요하다.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설민석을 비롯한 지식소매상의 활동에 불만이 없다. 벌어먹고 사는 방식일 뿐이다. 나 역시 대학과 서점을 돌아다니며 어쭙잖은 지식, 아니 정보를 나누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저 유명하지 않을 뿐. 


설민석은 자신의 일을 했다.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역대급’으로 해냈다. 영역과 분야를 막론하고 인터넷 댓글은 거르는 게 건강에 좋다. 좀비들은 피해야 한다. 시기심과 질투를 감춘 동종 업계의 비난도 걸러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비판’은 새겨들어야 한다.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비판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때 회복하는 힘이 생긴다. 


다행히 설민석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그중에서도 “설민석이 전하는 메시지는 항상 ‘우리’로 향한다”는 어느 역사학자의 진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TV라는 거대 매체를 통해 ‘대중’을 상대해서일까. 설민석의 강의는 언제나 민족과 국가와 국민으로 귀결된다. 불편하다. 내가 설민석의 강의를 멀리한 이유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함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중의 입맛에 맞는 MSG를 친 역사에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설민석의 강의를 예능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는 시간이 흘러 TV로 복귀하면 된다. 그만한 ‘역사 예능인’이 있던가? 예능을 하다가 오류가 생기면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하면 된다. 예능이니까. 단, 역사적 사실을 예능 요소를 동원해 설명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찰랑찰랑 들락날락하는 가벼운 파도 같은 강의를 하면 된다. 전쟁, 혁명 같은 역사적 사건을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하면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감동적인’ 메시지는 금물이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역사의 깊은 심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릿느릿 흐르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역사는 역사학자에게 맡겨야 한다. 


역사학자 주경철은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이라는 책에서 “현실이 숨 가쁘게 돌아가며 사람을 옭아매는 시대에 긴 호흡의 유장한 ‘문명’은 분명 희망으로 작용”한다고 적었다. 나는 이 문장에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역사학자는 역사를 온전히 ‘기억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설민석은 역사를 ‘상상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와 ‘재미’가 공생하는 구조다. 그러나 설민석의 역사 예능은 재미와 교양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중은 그의 방송과 유튜브를 교재 삼아 시험을 치르고 교양을 쌓고, 심지어 역사관을 갖춘다. 그 역사관은 우리만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이어진다.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같은 국민이라고 해서 모두가 설민석이 강조하는 역사관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애국이든 매국이든, 아니면 (나 같은) 회색인이든 그것은 ‘개인’이 정할 문제다. 역사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적 순간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보고 듣고 겪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나라나 자신이 정한 기준점에 근거해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배운다. 그리고 맹신한다. 히틀러의 역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가, 미국 패권주의의 역사가, 북한 김정은 체제의 역사가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이유다. 


우리의 역사 교육을 생각해본다.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확실한 소실점을 형성하기 힘든 어린 시절 우리는 국가와 학교로부터 역사를 주입받았다. 어른들의 역사를 공부하고 시험을 치렀다. 남북으로 동서로 세대별로 다른 역사를 특정 이데올로기에 맞춰 동질화시켰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his)’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너의 이야기도 있고, 그녀의 이야기도 있고, 우리의 이야기도 있다. 이런 역사가 있고 저런 역사가 있다. 고대의 역사가 있고 중세의 역사가 있고 근대의 역사가 있으며 현대의 역사가 있다. 지금은 네트워크 역사도 파악해야 한다. 그 다름과 변화의 흐름이 역사다. 


역사는 입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한쪽만 믿어서는 안 된다. 소설가 김훈의 통찰처럼 우리가 이 나라의 동쪽에 흐르는 동해 바다를 사랑하듯이 일본인들도 서쪽 바다를 아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오해마시라. 인정이 아니다. 긍정이 아니다. 인식이다. 소설가의 묵직한 진단처럼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다는 이 총체적인 관계가 인간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운명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설민석은 잠시 퇴장했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가 독특한 음색으로 마무리 짓는 ‘우리’라는 메시지에 환호할 거라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도 우리처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자긍심이 고취된 상태로 역사를 바라볼 뿐이다. 개진고진이다. 사는 곳이 다를 뿐 ‘같은’ 족속이다. 설민석의 강의는 한국인이라는 주관적인 시점과 입장을 기준으로 ‘한쪽’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게 사실이다. 그것은 선전과 선동일 뿐 배움이 아니다. 배움은 학문의 영역이다. 역사‘학’은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설민석 사태를 검증한 어느 역사 전문가의 육성이 들려온다.


“설민석의 예능은 ‘역사 교육’인가, 아니면 ‘정신 교육’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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