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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May 02. 2021

붙잡아라

되돌아간다는 것은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어 세상을 바라보는 서양의 기계적인 인식의 오류를 깨닫는 것으로 시작한다. 기계적인 것의 반대는 ‘유기적인’ 것이다. 저마다 다른 국가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보고, 저마다 다른 인종을 하나의 인류로 보고, 저마다 다른 종교를 하나의 섭리로 보는 것이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르지 않고, 이 체제가 저 체제보다 더 우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물(微物)을 포함한 모든 자연이 인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공원을 걸으며 눈부시게 푸른 신록을 바라보는 나의 시신경은 나무의 뿌리에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다. 나의 감각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나와 연결된 것이다. 


결국 마음이다.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의 감각이 달라진다. 사물과 사건은 일정하다. 그것은 인간과 달라서 변덕스럽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본래의 위치와 역할에 한없이 성실하다. 그것을 바라보고 대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시시각각 달라질 뿐이다. 기쁨, 슬픔, 우울, 분노, 포기, 외로움…… 마음의 극심한 변동은 철저히 나에게서 발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실체가 없는 감정에 휘말려 타인을 원망하고 세상을 불평하며 급기야 나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리하여 ‘힐링’이라는 상업적으로 소비될 수밖에 없는 정체불명의 개념을 찾아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하릴없는 짓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마음을 붙잡아야 한다. 그것 외에 방도가 없다. 움직이면 멈추기를 기다리고, 멈추면 고요함을 지속해야 한다. 


하늘을 보라. 소리 없이 움직이는 태양과 구름과 달을 보라. 땅을 보라. 제자리에 멈춰 있지만 가지를 키우고 꽃과 열매를 맺는 나무를 보라.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이며 소임을 다한다.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다. 사물은 근본적으로 운동과 변화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 근본적 속성을 자연은 알고 있지만 오직 인간만이 부정한다. 그래서 자꾸 움직임의 동기를 바깥에서 찾는다. 그것을 핑계 삼아 움직인다. 바깥으로 돌다보니 내 안에 갖고 있는 것들이 낡아 보인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것을 정체된 것으로 오인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 있을 때 잘하면 될 걸 없는 걸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진 후에야 후회하고 슬퍼하고 오열한다. 그렇게 내부에 본래 고여 있는 운동과 변화의 힘을 소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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