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은 통한다. 결국 같다. 극우와 극좌는 다르지 않다. 극미(極微) 세계의 원자 구조는 극대(極大) 세계의 태양계 구조와 거의 같다. 물리학자의 세계관과 동양의 세계관이 유사한 이유다. 프리초프 카프라가 1975년에 펴낸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 절대 증거다. 현대 과학의 개념과 신비주의 개념 사이의 유사성을 받아들인 그의 물리학을 세상은 ‘신 물리학(New Physics)’이라 불렀다.
다행인 걸까. 지금은 누구도 동양의 생각을 신비주의로 단정 짓지 않는다. 우선 서양이 달라졌다. 오랫동안 동양적인 것은 비과학적이라는 통념을 고수했던 그들이 자신들의 사상, 가치관, 태도, 사회 구조가 우리 시대의 불균형을 가져왔음을 인정하고 있다. 서양이 합리주의와 과학으로 세계를 분석하고 주장하여 경쟁과 확장에 몰두할 때 동양은 지혜와 종교로 세계를 융합하고 종합하여 협동과 보전을 추구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음양(陰陽)’사상에 눈을 뜬 것이다.
문화적 전환이다. 서양과 동양의 세계관, 과학과 영적 세계의 심오한 조화를 추구하는 흐름이 꿈틀거린다. 이는 단순한 인식과 감각의 차원이 아니다. 인간의 사상, 지각, 가치관을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리얼리티다. 세상은 ‘실재’한다. 세상은 분자(分子)와 원자(原子)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의 상호작용으로 새로운 입자(粒子)가 유동한다. 공간, 시간, 존재의 개념을 법칙으로 증명하는 물리학의 기본 원리다.
공간, 시간, 존재는 마음의 영역이기도 하다. 공간, 시간, 존재는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것이자 동시에 인간의 느낌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과학, 종교, 예술은 공간, 시간, 존재를 증명하고 느끼고 표현한다. 마음이다. 너무도 당연해서, 그렇기에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는, 아니 무엇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의식의 깊은 심연이라는 상투적인 수사학이 ‘실제로’ 어디에 위치하는지, 그곳으로부터 마음이라는 게 어떤 원리로 불쑥 떠오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종교의 영역, 이른바 신비주의적 세계관에 해결을 맡긴 채 미뤄두었다. ‘마음을 담은 길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없다’(카를로스 카스타네다)는 선구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려고 하지 않고 부모, 선생, 어른, 타인, 사회, 국가가 가리키는 길을 걸어간다. 심지어 그 길을 전력으로 내달린다.
근대 이후의 세상은 수학, 자연 과학, 기술 공학의 산물이다. 원자물리학이 뿌리를 틀었다. 인류에 번영을 가져다준 산업은 원자물리학의 성과다. 그 정점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다. 비극으로 끝났다. 당연히 다른 생각들이 일어났다. ‘포스트모던’의 시작이다. 동양의 인식론과 신비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동양의 인식론은 동북아 3국의 철학이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힌두교-불교-도교다. 두 가지가 동양적 세계관으로 합쳐졌다. 20세기 물리학이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으로 간신히 도달한 지점이기도 하다.
서양 철학은 이원론이다. 정신과 물질을 나누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우주는 영원히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이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은 달라서 변화는 감각의 환상에 불과했다. 그에게 우주는 유일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였다. 17세기 르네 데카르트는 마음과 물질로 분할하여 자연을 정의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정언은 물질은 인간의 이성과 분리되어 죽은 것이라는 얘기다. 인간은 육체에 내재하는 자아를 인식하게 되었다. 자아, 즉 마음으로 육체를 통제하고 제어하는 것, 그것이 삶의 숙명이었다.
아이작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도 다르지 않다. 뉴턴은 모든 현상의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여 해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를 분석하면 세상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고전 물리학의 기원이 된 그의 기계론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세상을 지배했다. 신의 법칙의 자리에 자연 법칙이 들어섰다.
분열이다. 데카르트와 뉴턴의 과학적 세계관은 의식과 무의식, 의지와 본능을 필연적으로 구분한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도 끊임없이 분열을 거듭한다. 그 쪼개진 마음은 세계에 안착해야 안정을 찾는 것이어서, 마음의 분열만큼 세계의 대상과 사건도 나뉘어야 했다. 모든 게 분열되면서 국가, 인종, 민족, 종교, 정치, 가치관이 쪼개어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다.
아니다. 본래 인간은 생성과 존재 이전에 ‘하나’의 원리로 세상을 품었다. 전일(全一), 완전함, 하나의 전체, 통일성이다. 기원전 6세기 초기 그리스 철학은 과학과 종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철학은 곧 과학이었다. 피지스(physis), 즉 자연이라고 불렀던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일이었다. 물리학의 시작이다. 그 시절의 과학은 곧 철학이었다. 모든 사물의 본질을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이 구분되면서 물리학은 물질적인 세계로, 철학은 정신적인 세계로 관심을 돌린 것뿐이다. 20세기 물리학의 성과가 있다면 하나의 원리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을 증명해낸 것이다. 철학과 물리학이 같은 토양에서 발아했다는 것을 증명시켜준 것이다. 지식의 최전선에서 최첨단을 추구한 이들이 말한다.
되돌아가라!
우리 시대의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