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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Apr 29. 2021

무미예찬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굴곡이 평평해지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은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한다. 나이 든 자의 눈은 희미하고 침침하다. 상관없다. 제대로 나이 든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보이고 들리지 않아도 들린다. 세상 이치를 깨우친 까닭이다.


늙어가는 당신에게 『무미예찬』이라는 책을 권한다. 책의 저자는 프랑수아 줄리앙(Francois Jullien). 프랑스 태생의 중국학 연구자다.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고, 베이징대학교와 상하이대학교에서 중국학을 연구했고, 파리 제7대학교에서 동양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콩과 일본에서 연구원 생활을 지냈다. 서구에서 보기 드문 동양 전문가다. 


‘무미(無味)’는 글자 그대로 ‘맛없음’이다. 담담함과 담백함이다. 줄리앙은 이 단어를 치우침 없는 중용 혹은 중립과 균형으로 이식시킨다. 무미는 자연스러움이다. 의미를 완성시키려고 일부러 채우지 않는 것이다. 무미는 시, 산문, 회화, 음악, 요리가 추구하는 미적 감수성이다. 동양화의 여백이다. 음식의 여미(餘味)다. 악기의 줄을 꽉 조이지 않은 소리다. 여음(餘音)이다. 일본의 하이쿠다. 여운(餘韻)이다. 채우지 않는다. 비운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충분하다. 


무는 ‘담(淡)’으로 이어진다. 담은 두드러진 특성이 없는 것이다. 은미(隱微),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이다. 절제다. 맛으로 치면 짠맛, 쓴맛, 신맛, 단맛 등 특정한 맛에 고착되지 않는 싱거움이라고 하겠다. 무미, 맛이 없어서 도리어 맛있다는 것이다. 물과 밥의 맛이다. 심심한 맛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는 중용, 평정, 중립, 균형, 여백, 조화, 초탈, 미완성…… 물과 공기처럼 질리지 않는 감미로운 담의 미학이 정갈하게 깔려 있다. 


물론 자극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무미의 담백함은 경쟁력이 떨어진다. 무미는 단맛, 쓴맛, 짠맛, 신맛을 이기지 못한다. 나를 봐주세요, 제발…… 존재를 드러내 나의 ‘있음[有]’을 강조하는 세상 이치와 맞지 않다. 상업적인 욕망이 전력 질주하는 세상에서 맛의 근원을 찾는 일은 어리석다. 우리는 강하고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 ‘중심’의 싱거움을 음미할 줄 모른다. 재미없음과 맛없음을 견디지 못한다. 『무미예찬』은 말한다. 맛있는 것을 추구하다보니 맛이 부실해졌고, 재미있는 것을 쫓다보니 재미가 없어졌다고. 뜨끔하다.


그러나 세상의 사물과 존재는 있음을 추구하지만 결국 없음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존재의 성질이다. 자연의 만물을 보라. 저마다 있어야 할 곳에 있다. 해야 할 일을 하지만 자기를 절대화하지 않는다. 저마다 갈 곳을 찾아 돌아간다. 억지로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을 배워야 한다.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담백한 맛, 담백한 사람, 담백한 삶…… 세상을 살아가며 고요히 평정을 찾는 것. 나이 든 자의 윤리다. 나이 든 자의 ‘에티카’다. 


당(唐)의 시인 두보의 인생이 그러했다. 젊은 날 ‘화려’했던 그의 시는 나이가 들면서 ‘평담’해졌다. 삶과 사물의 겉모습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으로 나아가는 감수성, 그  ‘좋은 선한 감정들’에서 올바름[正]이 생성됨을 말년의 두보는 읊었다. 무릇 좋은 예술이란 담백함과 평담함으로 칭하는 근본의 맛, 사물의 가장 진정한 뿌리의 맛을 지닐 때 나오는 법이다.


고요함의 멋과 싱거움의 맛. 

무한히 음미할 수 있는 ‘맛없음’에서 도(道)가 우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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