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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May 13. 2021

이유 없이 좋은 일


나는 패러독스다. 역설적인 사람이다. 일하기 좋아하면서도 일하지 않는다. 이 일을 해보면 어떨까, 저 일을 해보면 어떨까. 이 일을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저 일을 저렇게 하는 건 어떨까. 늘 일 생각이다. 자연스럽게 피어오른다. 가급적 하지 않는다. 해야 한다면 최소한의 일을 궁리한다. 최소한의, 미니멀한, 드라이한. 나의 기준이다. 


나의 본모습은 무엇일까. 고민 끝에 찾은 게 있으니, 그것은 ‘개인적’이면서도 ‘멀리’ 뻗어나가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선택했나 보다. 책을 읽는 일은 개인적이다. 동시에 책을 만들면 멀리 뻗어나간다. 글을 쓰는 일은 개인적이다. 그 글이 모아지면 멀리 당도한다. 이렇게, 지금처럼. 


물론 책을 읽는다고, 글을 쓴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글과 말이 사람을, 관계를, 세상을 망치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나는 글과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다른 재주가 없는 나의 임시방편일 뿐. 제대로 된 글과 말을 위해 나는 몸을 움직인다. 약속이 없는 날은 동네를 떠나지 않는다. 집에서 걸어서 사무실에 간다. 가방을 놓고 가까운 공원을 걷는다. 산책을 마치면 사무실 앞 스타벅스에 가거나, 좀 더 걸어 두 블록 떨어진 파스쿠찌에 간다. 두 공간 모두 아파트 단지에 있어서 시내보다 조용하다. (커피가 아닌 공간이) 마음에 든다. 혼자 일해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는 최적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만드는 책의 원고를 살핀다. 요즘은 여럿이 함께 만드는 ‘앱(App)’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에 주력한다. 그러다 커피를 마시고 창 밖 풍경을 바라본다. 얕은 말을 내뱉는다. 좋다.  


어떤 날은 서점에서 하루를 작파한다. 다행히 근처에 교보문고와 예스24 중고 서점이 있다. 교보문고에 가서 새 책 동향을 살핀다. 예스24 중고 서점을 찾아 읽을까 말까 고민했던 책을 집어 든다(저렴하니까!). 책은 구입하는 즉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읽지 못한다. 방금 산 책을 들고 카페에 간다. 한 권을 차분히 읽는다. 끝까지 읽는다. 해가 저물면 다시 걸어서 사무실에 간다. 하루를 마무리한다. 


특별한 일상은 아니다. 내세울 만한 게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게 있으니 가급적 ‘일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만 하고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선택한 ‘업’의 본질이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나는 서점과 독자의 도서 주문을 처리해야 한다. 책의 제작을 완성도 높게 관리해야 한다. 협력해서 편집과 디자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출판사에 자신의 창작물을 맡겨준 작가를 위해 책의 흐름을 신경 써야 한다.


코로나로 연기된 비엔날레도 준비해야 한다. 성수동 테크 기업에서는 최고 연장자인 내가 비엔날레 큐레이터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어리다. 앱을 만드는 일과 전시를 꾸리는 일의 특성이라고 할까. 생산성 도구를 통로 삼아 앱을 만들다가 무조건 얼굴을 마주보고 소통해야 하는 선배 큐레이터들을 ‘모시고’ 일하다 보면 절로 혼잣말이 나온다.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그럼에도 미술의 일을 놓지 않는 이유는 작품이 놓인 공간을 걷는 일이 ‘참’ 좋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좋은 일. 그런 일은 떠나보내서는 안 된다.


이렇듯 일의 본질만 고민해도, 사람과의 약속만 지켜도 일은 넘쳐난다. 쓸데없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최대한 장애물 없이 나의 일을 해야 한다. 도구든 방법이든 제도든, 그리고 사람이든…… 장애물은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일이다. 일의 기준에 ‘돈’은 필수다. 그렇다고 연연하는 모습은 금물이다. 쪽팔린다. 생활필수품을 마련한 다음에 여분의 것을 더 장만하는 대신 다른 것을 해야 한다. 나의 하루는 그 일에 맞춰져 있다. 삶을 위한 일, 나를 위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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