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독립 서점을 다니며 수업을 한다. 철학 수업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기분이 좋고, ‘돈’이 최고인 시대에 그것보다 소중한 가치를 나누는 일이 좋고, 수업을 마치고 책을 읽으며 빈둥거려도 죄책감이 들지 않아서 좋다. 철학 수업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다. 그 정도에 그치는 일이라면 굳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르친다’는 말은 오만하다. 누가 누구를…….
나에게 철학 수업이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지혜로운 자들의 언어와 생각을 기억하고 찾아내는 일이다. 이 사람을 잊어서는 안 돼요, 이 말을 기억해요, 이 책을 읽어요……. 책을 읽고 공부하다가 나누고 싶은 달뜬 마음을 저어할 수 없을 때 나는 철학 수업에 나선다.
다행히 나의 일을 지켜주고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말을 건다. 다가오는 계절에 철학 수업을 하면 어떨까요? 대부분 흔쾌히 받아주신다. 책이 있는 공간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철학을 나누는 일.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서둘러 읽고 기억해야 하는 일을 제안하기. 그건 어쩌면 내 곁의 사람들이 좀 더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동안 철학 수업을 하지 않으려 한다. 글을 공부하고 말로 나누는 일을 그만두겠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글과 말로 생계를 연명할 수밖에 없는 족속이 있다. 글을 쓰기 위해 말하는 사람인지, 말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인지 헷갈리는 사람들. 나 같은 사람이 있다. 좋은 일은 아니다. 나 또한 살아가며 ‘하필 글과 말로 생계를……’이라는 말을 달고 사니까. 그런데 어쩌랴.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인걸. 걱정 마시라. 내가 글과 말로 생을 이어가며 깨달은 사실은 이 두 가지로는 넉넉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보다 여유로운 일상을 영위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제 다른 공부를 하려고 한다. 글과 말의 주제를 바꾸려 한다. 네트워크! 네트워크 사회의 문화 구조를 살피는 공부에 집중하려고 한다. 세상은 늘 변한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격변하는 시절은 없었다. 일본의 사상가 후쿠시마 료타에게 배운다. ‘전통적인 신화’를 넘어 우리 시대 정보처리 방정식으로서의 신화, 이른바 ‘네트워크 문화론’을 공부하고, 나누고 싶다.
과거의 신화는 절대 권력으로 머물러 있었다. 권력을 가졌기에 움직이거나 나눌 필요가 없었다. 네트워크 시대의 새로운 의미의 신화는 다르다. 지금의 신화는 한 가지 원리나 법칙으로 설파되지 않는다. ‘정보+네트워크’라는 단어가 이미 복잡성을 함축한다. 지금의 신화는 그 복잡한 의미를 단순화하거나 또는 확장시킨다. 움직이고 이동하고 운동한다. 지금의 신화는 이중적이다. 통속적이면서 동시에 메시지를 품어야 한다. 하위문화의 운동력과 순문학의 감수성을 지닌다.
과거의 신화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어 있었다. 낡은 의미의 신화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단순하다. 알고리듬, 즉 정보 처리 방정식이다. 알고리듬은 우리의 삶을 극도로 단순화시킨다. 스마트폰을 ‘터치’만 하면 삶이 구성된다. 동시에 알고리듬은 삶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SNS가 효율적으로 기능할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오늘의 신화는 알고리듬으로 이루어지는 무수한 정보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오늘의 신화는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하위문화가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는 것이다.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다. 아니, 본래 새로운 문화란 아래로부터 위를 뒤집는 데서 나오는 법이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무라카미 하루키로 이어지고, 그것이 휴대폰소설이나 라이트노벨로 귀결되는 과정의 메커니즘을 우리는 이미 겪은 적이 있다. 지금은 게임이다. 게임은 가상이지만 그 나름의 질서 안에서 객관적 세계를 구성한다. 이제 게임은 ‘포스트모던 신화’다.
새로운 신화를 공부하는 데 2000년대 일본과 2010년대 한국만큼 좋은 교과서는 없다. 2000년대 들어 일본에서는 이데올로기 시대가 끝나고 자유주의와 소비사회 시대가 찾아왔다. 기성세대의 인문적 가치관에서 볼 때 논의할 가치가 없는 일이 일본 문화에 나타났다. 고유한 인격체로서의 작가주의는 저물고 온라인을 무대로 익명의 군중-집단이 유사 창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통속성을 넘어 작품성을 의심할 만한 이 새로운 물결은 오늘날 포스트모던한 창조성의 최첨단이라는 근(近)과거가 되었다.
물론 기성세대는 강력하게 저항한다. 역사, 전통, 민족, 국가, 체제, 제도 등의 변화를 일본의 기성세대는 일본(성)이 사라진다고 보았고, 한국의 기성세대는 한국(성)이 사라진다고 우려했다.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로 지탱하던 기성세대의 마지막 저항은 대중문화로 모아진다. 이 나라의 ‘트롯’ 열풍이 대표적이다. 후쿠시마 료타는 이러한 기성세대의 저항을 ‘문화=의지’였던 시대의 유산이라고 명명한다. 한마디로 ‘게임 끝!’이라는 것이다. 인터넷에서의 ‘문화=기호’를 자명한 풍경으로 받아들이는 ‘(초)현대인’에게 기성세대의 문화 개념으로서의 마지막 저항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과거의 한물간 이야기는 반복한다고 돌아오지 않는다. 앵콜 요청 금지!
문제는 나 같은 어정쩡한 세대에게 있다. ‘문화=의지’에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기성세대도, ‘문화=기호’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젊은 세대도 아닌 ‘낀’ 세대는 양가적(ambivalent)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양쪽 의견에 귀를 기울이되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못하는 상태. 그런 사람들이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과거를 예찬하는 것도 아니고 기술 중심적인 다가오는 사회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도 아닌 사람들, 폭주하는 자본주의 열차에서 내려 ‘중간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무엇을 의지해야 할까.
‘경계’다. 이것을 바라보다가 저것을 바라보고, 이것을 이야기하다가 저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른 생각과 장르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는 엄격하고 진지한 하이컬처(highculture)와 통속성과 유머로 무장한 서브컬처(subculture)의 경계를 유영하는 것이다. 요즘 나는 과거의 인문학과 정보화 사회의 새로운 인문학을 동시에 읽고 있다. 책을 만들고 동시에 앱을 만들고 있다 이유는 하나.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그렇게 흐르고(streaming)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