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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May 20. 2021

세카이계, 그 작은 간격


‘제로연대’라는 시대 구분이 있다. 일본의 2000년부터 2009년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라이트 노벨, 아키하바라, 인터넷 영역 또는 공간에서 ‘오타쿠’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다. ‘세카이계(セカイ系)’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1996),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2002), 2002년 제23회 메피스토상을 수상한 니시오 이신의 소설 『잘린 머리 사이클』(2002), 제16회 미시마 유키오 상을 수상한 마이조 오타로의 소설  『아수라 걸』(2003), 다니가와 나가루의 라이트 노벨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 오바타 타케시의 만화 『데스 노트』(2003~2006) 등 오타쿠 문화에서 ‘이 작품은 세카이계다, 아니다’가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세카이계란 무엇일까? 일본의 오타쿠이자 소설가인 마에지마 사토시의 『세카이계란 무엇인가』의 17페이지를 펼친다. 소년과 소녀의 연애가 세계의 운명과 직결한다, 소녀만 싸우고 소년은 전장에서 배제된다, 사회에 대한 묘사가 없다 같은 요소를 띤 작품을 세카이계라고 부른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단어의 애매함에서 알 수 있듯이 “세카이계는 이런 것이야”라는 작품을 콕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마에지마 사토시 역시 “세카이계란 하나의 유행어이며,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오타쿠 문화가 세카이계의 반영일 수도 있고, 등장인물의 혼잣말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작품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실체 없는 실체 있는’ 단어는 2000~2009년이라는 10년을 대변하는 단어 혹은 세계관이라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아즈마 히로키처럼 세카이계를 하나의 ‘문예 운동’으로 바라보고 강력히 지지하는 사상가든지, ‘제로연대의 상상력’을 논하며 2008년 일본의 비평 공간에 혜성같이 등장한 우노 쓰네히로처럼 세카이계를 ‘말의 유행’으로 가치 절하하는 사상가든지, 그 대립 자체가 하나의 세카이계라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마에지마 사토시는 ‘모에(萌え, 일본의 애니메이션, 만화, 비디오 게임 등에서 등장인물을 향한 강한 애정)’라는 단어를 세카이계의 리트머스로 삼는다. 그에게 모에란 1990년대 오타쿠 문화(아즈마 히로키)와 2000~2009년 제로연대 오타쿠 문화(우로 쓰네히로)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단어다. 1990년대의 모에는 단순히 오타쿠가 좋아하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았으나, 제로연대에 와서는 ‘오타쿠=미소녀에 모에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세카이계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세상에 등장한 1995년을 시작으로 2010년대 전까지의 제로연대에 걸쳐 일어났던 일본 서브컬처의 ‘변화’를 지칭하는 단어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세카이계의 탄생, 즉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시작으로 일본의 오타쿠 문화는 애니메이션에서 라이트 노벨이나 미소녀 게임으로, 그리고 ‘니코니코 동화’라는 콘텐츠를 매개로 한 커뮤니케이션으로 변화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1995년부터 2010년까지의 일본 오타쿠 문화의 흐름을 살피자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세카이계, 즉 ‘세계’다. 세계는 세계이되 조금은 다른 세계. 좀 더 좁히자면 ‘작은’ 세계를 말해야 하는 시대가 왔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나에게 세카이계란 유대인으로 태어나 신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사상을 만들었던 스피노자의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긍정이고, 피츠제럴드와 챈들러의 ‘개인의 시선(private eye)’을 이어받은 하루키의 소설 속 ‘나’가 통과하는 다양한 풍경과 사건이며, 어느 가을날 놀라운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다가 ‘이 우주에 나 혼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소설가 김연수의 고백으로 다가온다.



스피노자, 하루키, 김연수…… 읽고 쓰고 생각하며 세상과 분명한 ‘간격’을 둔 사람들. 그들이 평생에 걸쳐 노력해서 지켜온 ‘간격’, 그 작은 틈이 나에겐 세카이계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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