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6년 7월 27일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지구의 시나고그(유대인 공회당)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바뤼흐 데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년 11월 24일에 태어난, 당시 스물셋의 청년에게 포르투갈-유대인 공동체는 세상에 명문화된 모든 ‘저주’를 내렸다. 가증한 이단, 가증한 행동, 가증한 생각, 낮에도 밤에도 누워 있을 때도 서 있을 때도 갈 때에도 올 때에도 저주를 받을 것,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글을 쓸 수 없고, 호의를 베풀 수 없으며, 그가 쓴 글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 이어졌다. 파문(破門)!
이스라엘 민족과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했지만, 스피노자는 담담했다. 유대인 공동체를 이끄는 랍비의 자리를 버리는 것도, 경제적으로 윤택한 상인의 삶을 포기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종교란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종교적인 훈련을 받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근시안적 관점과 종교에 빠진 광신자들을 혐오했다. 그에게 종교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인식론 ‘너머’에 자리한 지식의 최종 형태를 통해 자연의 본질을 완전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에 도달하기,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무였다. 그 앞에서 돈, 사랑, 감각은 무용했다.
그래서일까. 스피노자에겐 17세기부터 지금까지 레인스뷔르흐의 하숙집 골방에 처박혀 렌즈를 깎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쓴 ‘철저한 금욕주의자’라는 이미지가 덧입혀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금욕’이라는 단어는 그의 명저 『에티카』를 관통하는 ‘삶의 긍정’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
『스피노자 매뉴얼』을 지은 피에르-프랑수와 모로는 스피노자에게 덧입혀진 금욕이라는 단어를 ‘간소한 삶’으로 치환시킨다. 『에티카』에 기술했던 것처럼 그는 적당하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향수를 뿌리고, 보기 좋은 식물을 즐기고, 옷치장을 하고, 음악 감상과 놀이를 즐기고, 연극 관람 및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누리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커뮤니케이션의 시작과 끝이었다. 『스피노자 매뉴얼』의 90쪽을 열면 스피노자는 언제나 “친구, 제자, 서신 교환자들의 네트워크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는 늘 편지를 썼다. 친구의 집을 찾아 여행을 떠났고, 자신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공부의 과정을 점검했다.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는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 선과 악은 관점에 달린 문제일 뿐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나누었다. 요즘으로 치면 메일을 주고받고, SNS로 소통하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나눈 것이다.
물론 세상은 그의 생각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스캔들과 뒷담화에 관심 있을 뿐 ‘다른’ 생각에 무심하다. 세상의 세계와 스피노자의 세카이계의 간극은 이승과 저승만큼 멀었다. 스피노자는 개의치 않았다. 세상 만물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형태로 존재할 때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바꿀 수 없다, 그러니 소망도 두려움도 비참함도 공포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세카이계를 읽고 묻고 답했다.
스피노자가 14년을 공들인 『에티카』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용감한 출판인’으로 불렸던 얀 리우베르츠가 있었다. 아~ 출판이여, 오~ 출판인이여!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책을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에 따라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된다. 그 길이 나에겐 세카이계로 다가온다.
물론 스피노자에게도 세계를 목표로 삼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 시절 그는 시장에서 돈을 벌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지금의 우리처럼. 어느 날, 세카이계가 보였다. 목표를 향한 열정과 감정을 배제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 1675년 스피노자가 마흔 둘에 세카이계의 결정체 『에티카』를 완성했을 때, 암스테르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나고그(회당, Synagogue)가 들어섰다. 스피노자에게 시나고그는 어떻게 비쳤을까. 아무리 높고 커다란 성전을 지어도 신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조용히 말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