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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May 24. 2021

1인칭 단수

‘현대 일본 최후의 사상가’로 일컫는 후지타 쇼조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본의 지식인이다. 위안부 할머니,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그의 통렬한 역사 인식은 우리와 궤를 같이한다. 


어부지리(漁夫之利). 후지타는 일본의 정체성을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우는 바람에 엉뚱한 제3자가 덕을 본다’는 말로 정의한다. 제1차 세계대전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을 거쳐 미국과 소련의 냉전까지. 일본은 이웃의 불행을 밑천 삼아 돈벌이하고,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자국의 이익으로 전환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다며 자국의 국력을 가치 절하한다. 2014년 우리말로 옮겨진 『전체주의 시대 경험』에서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난 후에도 일본의 지위를 ‘미국 다음’으로 여기는 일본인들의 허세를 안타까워한다. 


다행인 걸까. 1980년대 거품 경제는 붕괴되었고 일본은 장기불황에 돌입했다. 그 사이 미국 다음은 중국 차지였다. 불안했을까. 일본의 선택은 아베 신조 정권이었다.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보이지 않는 불안의 선택은 다시 ‘우익’이었다. 


후지타의 역사 인식의 백미는 ‘독립’이라는 단어에서 절정에 달한다. 독립에 관한 그의 발언은 이웃나라에 이런 사상가가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독립을 존중하는 것이 본래의 독립정신일진대, 청일·러일 두 전쟁으로 비로소 일본의 독립이 확립되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웃 조선의 독립을 유린함으로써 단지 서구에 대한 자국의 독립을 확보했다면 그것은 정신적으로는 독립이 아니다. 독립정신을 지닌 자라면 당연히 타인의 독립, 다른 사회의 독립도 존중할 테니까 말이다.”

후지타 쇼조, 『전체주의 시대 경험』 중에서


일본은 왜 독립을 존중하지 않는 걸까. 후지타는 일본에 주체적인 ‘개인’이, 그런 독립적인 개인들이 모여서 만드는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국가주의에 종속된 개인들의 집단. 그것이 일본의 실체라는 것이다. 통렬하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도 후지타의 손을 들어준다. “이미 오래전에 이 나라 일본의 근대화는 끝났다.” 그는 『자살보다 섹스』라는 산문집에서 ‘근대화’라는 키워드로 자신의 나라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그에게 일본이란 근대화라는 국가적인 대목표가 달성되어 현재는 국가적인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무기력한 영토에 불과하다. 


일본의 근대화는 전쟁과 침략으로 달성되었다. 전쟁과 침략의 시대는 남자의 시간이다. 하지만 근대화라는 대목표가 사라진 지금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써온 ‘아저씨’들이 더 이상 존경받지 않는 사회, 소설가에게 주는 아쿠타가와 상이나 대중음악가에게 주는 일본 레코드 대상을 누가 받았는지 화제에 오르는 경우가 드문 나라가 되었다. 그는 단언한다. 드디어 ‘개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그런데 일본은 그것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고. 


그렇다면 개인의 시대를 상징하는 정체성은 무엇일까. 류는 ‘좋아하는’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단어를 꺼낸다. 


“앞으로의 시대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는 사람이 이끌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무라카미 류, 『자살보다 섹스』 중에서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은 그런 일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 인생을 충실히 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 그 ‘차이’는 ‘좋아하다’는 단어에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일본 사회가 어린 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 그 단어를 선뜻 내어줄 리 없다. 다음 세대가 전쟁과 침략의 시대를 재현해주길 원하는 일본의 기성세대, 아니 아저씨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충실한 일생을 보내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최악의 시나리오일 테니까 말이다. 


류의 『자살보다 섹스』는 일본에서 2003년에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을 2014년 4월 12일에 읽었다. 얼추 10년 터울이다. 그 시간의 간극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때를 기점으로 우리 역시 사회가 원하는 ‘나’를 의심하게 되었다. 국가적인 규모와 기업의 강요, 그리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온 집단의 모럴에 순종하는 사회의 부속품이 아닌 궁극의 ‘개인’, 그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최소한의 ‘관계성’을 고민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후지타의 세계관을 통해, 류의 탐미적인 글을 통해 일본의 겉과 속을 들여다보노라면 새삼 하루키의 문학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루키 월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1인칭 화자’의 정체성이 일본의 영토 안에서 쉽사리 나오기 힘든 것임을 깨닫게 된다. 


소설 속 ‘나’의 평범한 일상, 내가 맺는 인간관계, 언제나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환상의 통로…… 그렇게 만들어지는 ‘나’의 미스터리한 세계관. 바야흐로 ‘1인칭 단수’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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