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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May 25. 2021

낯선 깨달음

깨달음이란 인류의 정신사를 이끈 성인(聖人)이나 옛 선현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깨닫는다’라는 순간이 어떤 느낌인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아가며 우연한 순간에 어떤 사건을 통해 희미하게 느껴지는 게 있으니, 그것을 어설픈 깨달음이라고 해도 좋겠다. 누구나 그런 순간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풍경과 사물의 윤곽을 인식하게 해주는 빛의 투영으로 올 수도 있고, 신체 한 부분을 관통하는 듯한 감각의 도래로 느낄 수 있다. 


아무래도 우연한 혹은 어설픈 깨달음은 ‘낯선’ 시간과 공간이 가져다줄 때가 많다. 그때, 그곳이 지극히 일상적이어도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여긴다. 낯섦이 중요하다. 


어쩌면 낯섦은 낯설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낯설어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올 수도 있다. 반대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익숙한 상황도 다르게 바라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낯선 순간이나 상황, 거기에서 발생하는 깨달음은 그런 순간이 특별히,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착하는 ‘나’의 상태가 중요할 수 있겠다. 내가 볼 수 있어야 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의 시작이다. 


화가 이름과 작품 제목까지 알고 있는 미술 작품이 다르게 보이고, 익히 알고 있던 노래가 다르게 들리고, 매일 마주치는 일상의 사물이 다르게 다가오는 순간. 깨달음은 어떤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일상 곳곳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깨달음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지금-여기 나의 깨달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낙엽이 자욱한 가을 거리를 손잡고 걷는 연인이라고 해서 깨달음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깨달음의 영역이나 차원이 아니다. 눈앞의 현상일 뿐이다. 


요즘 나는 깨달음의 독서를 하려 한다. 새 책을 두리번거리기보다 서가에 놓인 책을 다시 읽고 있다. 읽고 또 읽고. 한 번 읽고 두 번 읽으면 자꾸만 생각나는 독서에 맛을 들였다. 한 권의 책을 다시 읽고 표지를 펼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면지(표지와 본문 사이에 낀 종이)를 살핀다. 책을 사면 그날 날짜를 연필로 적는 내 습관 덕분에 그 책을 언제 구입했는지가 적혀 있다. 그날, 나는 왜 이 책을 샀을까. 누가, 무엇이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을까. 그날 나는 어떤 하루를 살아가는 자였을까. 그 시절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그리고 깨닫는다. 그때의 읽기와 지금의 읽기 사이의 차이를. 책을 기준으로 아무 변화가 없을 때도 있고, 나조차 믿기 힘들 정도로 변화가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때도 있다. 무엇이든 깨달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책을 구입하던 나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책을 설레어하며 읽어내려 가던 그때의 나도 더는 만날 수 없다. 다행히 이 책을 다시 읽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꿈꾸고 있었을까.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며 교양을 가르치는 자로 살고자 하는 젊은이였을까. 그 시절 젊었던 나도 지금처럼 글과 말을 믿으며 하루를 마무리했을까. 그때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훗날 순간순간 글과 말의 짓을 그만두려고 했다는 것을. 지금 이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외부로 눈을 돌리려 했다는 것을. 그러다가 결국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는 것을.  


분명한 것은 그 시절보다 늙어버린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삶의 문제는 구조와 자세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삶의 구조보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 그렇게 될 때 구조를 바꾸지는 못해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은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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