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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Nov 21. 2021

1미터 철학

지금은 뮤지컬에 전념하고 있는 배우 안재욱은 한때 가수로도 활동한 적이 있다. 손지창, 김민종, 차태현처럼 배우와 가수를 병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차태현을 좋아했는데, 이유는 하나. 그의 히트곡 <I love you>가 나 같은 보통 남자도 노래방에서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노래방 무대로 나간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유튜브를 여는 것도 좋겠다.) 전주가 흐르면 머리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는다. 전주가 제법 웅장해지면 양 손을 크게 벌려 날갯짓을 하며 첫 가사를 내뱉는다. 처절하게. “후회해~ 내 사랑을 널 믿은 바보 같은 나를~ 이제 나 널 보내야 하는 준비를 해야 하잖아~”더 슬픈 표정을 짓는다. “왜 떠나려고 하니 내가 뭘 잘못한~ 거니 내 마지막 사랑은 바로 너인데~”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중간 부분이 나온다. 슬픔을 멈추고 마음을 굳게 잡는다. “(스타카토처럼 끊어서) 너를 위해 돌아서는 게 아냐~ (분노하듯이) 이미 넌 그에게 갔잖아” 이 순간, 포인트 안무가 첨가된다.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의 율동처럼 양손을 허리에 대고 좌우로 돌려준다. 그리고 떠나간 그녀에게 급짜증을 부린다. “내 사랑 내 상처 너에겐 중요하지 않잖아.” 아, 가사를 타이핑하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온다. 나를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 사람. 그런데…… 바보……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감정이 고꾸라진다. 머리 감는 춤, 오른손을 올려 머리를 감듯 돌리며 해서는 안 될 고백을 하고 만다. “내게 잊으란 말 하지 마~ I love you 네 모습 지워질 때까지~ 그와 행복한 네 모습을 가~끔 보여 주겠니.” 안 돼~ 거의 윤종신의 <너의 결혼식> 수준으로 끝을 맺는다. 졌다. 물론 나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아직 나에겐 12척의, 아니 2절이 남아 있다. 전주보다 더 장엄하게 울리는 간주에 유명한 ‘새 춤’으로 슬픔을 삭인다. 사람들이 웃어도 굴하지 않고 양 손을 휘저으며. 훠이 훠이. 


안재욱에게도 히트곡이 있었는데, 그건 <친구>라는 노래다. 바이러스가 횡행하기 전, 나이 들어가는 남자들이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방을 찾아 서로 어깨동무하며 부르기 딱 좋은 노래. 91년도에 대학에 입학한 과 동기들은 매년 12월 사당역 주변에서 송년회를 갖는데, 그때마다 꼭 이 노래를 짐짓 성스러운 표정으로 부르던 녀석(들)이 있었다. 물론 난 기겁이다(나의 마지노는 차태현이다, 라는 ‘부심’이 있다). “괜스레 힘든 날 턱없이 전화해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던” 친구도 없고, 그래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도 없으며, “세상에 꺾일 때면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제 곧 우리의 날들이 온다고” 믿는 친구에게 그런 건 없다며 술 한 잔 따라주는 사람이 나라는 인간이다. 


물론 나에게도 친구가 있다. 많지 않을 뿐. 자주 만나지 않을 뿐. 그래도 1년에 한 차례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학교 친구들의 송년 모임은 나가는 편이다. 늙어가고 낡아가는 추억이 불러일으키는 감흥을 애써 피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그 추억이 우중충해지는 순간이 오면 정신이 퍼뜩 든다. 커피와 음악에 관한 글을 기깔나게 쓰는 김갑수 선생은 “과거는 기억의 선택작용에 의해 명료함이 있는 반면 현재의 나날은 도대체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불분명하기 때문”(『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15쪽)이라며 과거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나는 불분명한 현재를 선택하고 싶다. 적어도 현재는 추억에 허우적거리게 만들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늘 사람을 구조 조정한다. 기업이 급변하는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 사업 구조나 조직 구조를 효율적으로 개선하듯이 조금씩 변하는 나의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관계 구조를 개선해나간다. 인품이 부족하다 보니 관계 악화로 치닫는 경우도 있어서 구조 조정을 당하기도 한다. 어쩌랴, 그게 나인 것을. 


냉정한가. 글쎄다. 나와 사람 사이에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나를 위한 일이자 상대방을 위한 일이다. 어차피 인생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 모든 행위는 늘 변하여 한 가지 모습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건 관계도 마찬가지여서 그때그때 변하는 관계의 밀도와 거리에 따라 스탠스를 취하면 된다. 지금은 가까워도 언제든지 멀어질 수 있다고 여기고, 비록 지금은 소원해도 언젠가 다시 밀착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중요한 건 스탠스의 중심이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미터 개인의 간격』이라는 책이 있다. 철학사에서 ‘가장 개인다운 개인이었던’ 스피노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개인’으로 사는 기술을 적은 책이다. 책에 따르면 내가 나다운 범위를 지키고, 그 안에서 행복하고, 그 결과 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 절대 기준은 반경 ‘1미터’라고 한다. 선명한 기준이다.


우리는 늘 관계 맺기에 힘쓴다. 관생관사(關生關死), 관계에 살고 관계에 죽는다. 그래서 틈틈이 고꾸라진다. 그때마다 나의 행복은 널을 뛴다. 관계의 조울증. 우리는 왜 관계를 중요시하는 걸까. 고독이 힘들어서, 고립이 두려워서, 먹고사는 일을 위해(영업 관계?)…… 결국 나의 행복 때문이다. 관계의 양과 질로 행복을 재단하는 우리들.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이거야 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시해온 사회적 관습이 아닐까? 


인간은 행복해야 한다. 절대 명제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아 나날이 더욱 새로워지겠다[日新又日新]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좀 그렇다. 그 순간, 행복은 내가 도달해야 하는 먼 미래에 있는 것이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1미터 개인의 간격』은 행복은 나를 중심으로 반경 1미터 내에 있다고 똑 부러지게 거리감을 조정해준다. 1미터, 바짝 붙어 있지 않을 뿐 손을 내밀면 잡힐 거리다. 우리가 손을 내밀지 않아서 잡지 못할 뿐. 당연한 얘기이지만 1미터 바깥의 행복은 잡을 수 없다. 잡으려면 1미터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까짓 1미터? 문제는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1미터 안의 행복을 보지 못하고 자꾸만 밖으로 나가려 한다. 닿을 것 같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묻는다. “얼마면 돼?” 그렇게 죽을 때까지 돈을 벌기 위해 산다. 


내 팔이 닿는 길이인 1미터는 개인주의자로 살기 위한 간격이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다. 행복은 그 1미터에 갇히지 않도록 ‘간격’을 조절하는 간단한 기술이다. 나-관계-행복의 풀리지 않는 삶의 트라이앵글에 대한 ‘스피노자식 개인주의자’로 살아가는 홍대선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 고 생각했지만 후다닥 바람을 내려놓는다. 그건 내 1미터 바깥의 영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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