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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Nov 19. 2021

자존감이라는 거짓말

미국에는 알렉산드라 오카시오-코르테즈라는 정치인이 있다. 물론 만난 적은 없다. 내 주제에 누굴. 그래도 나도 보고 듣는 것은 있어서 그에 대한 ‘info' 정도는 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기금 모금 행사에 ‘부자에게 세금을’이라는 문장을 새긴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민주당 의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좌파 밀레니얼’로 불리는 인물, 그리하여 80년대 초기와 90년대 중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그 이후 태어난 줌머들을 대표하는 인물. 오카시오-코르테즈는 부와 권력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갈수록 힘을 얻을 거라는 변화의 리트머스다.


어른들은 위기를 상대방과 싸우는 데 이용한다. 확신하건대 그들은 눈앞의 위기를 즐길 게 분명하다. 상대 정파를 비판하는 데 써먹을 기회야, 유력 정치인을 주저앉히기 딱 좋은 먹잇감이야. 저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지만 해결될까봐 전전긍긍해하는 모습이 어른들의 초상이다. 청년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위기는 삶의 실존과 직결되어 있다. 처음에는 어른들이 기획하고 만들어낸 뉴스를 통해 위기를 접한다. 


다시 확신하건대 뉴스에 떠도는 위기는 진짜 위기가 아니다. 인류를 뒤흔든 위기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가 어른들도 조정할 수 없을 무렵 눈앞에 나타난다. 다행인걸까. 이제 청년들도 위기의 표면이 아닌 그 이면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주택 위기, 기후 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에서 찾게 되었다. 당연히 자본주의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청년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청년들은 왜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게 되었을까. 어렵지 않다. 힘들어서다. 기후 위기, 금융 위기, 주택 위기…… 청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일자리를 얻어 저축해서 일상을 누리는 것이 환상임을 깨달았다. 넷플릭스와 예능에 등장하는, 너무도 당연해 보였던 일상이 어른들에게 순종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돈에 목을 매는 청년들도 많아졌다. 그야말로 ‘영끌’이다. 어른들이 젊은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만든 각종 '성장 이론'에 혹해서 젊음을 갖다바친다. 안타깝지만 쓸데없는 노릇이라는 우려와 잉여가치를 투자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종자돈’이라도 마련하기 위한 투자라는 항변이 오간다. 둘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지구촌 밀레니얼의 생각의 변화를 주시하는 것만큼 미래를 위한 투자는 없을 듯하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퇴직금 50억 원을 수령한 사람보다 내 능력으로 ‘플렉스’하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세대, 권력과 자본주의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보다 지구를 위해 노력하는 억만장자를 존경하는 세대, 기본소득과 부자 증세를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는 정치인을 ‘패스’하는 세대, 경제가 작동하는 법을 알게 된 이상 그 공식을 벗어나려는 세대. 그들의 시대가 곧 찾아올 것이다.


교육도 바뀔 것이다. 인종, 정체성, 계급을 주제로 온라인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콘텐츠가 교육을 대체할 것이다. 트위터와 틱톡이 청년들의 급진적인 정치적 콘텐츠를 실어 나를 것이다. 펜데믹 동안 온라인으로 수업을 받는데도 학자금을 갚아야 하는 청년들의 의문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의문은 팬데믹이 종료되어도 지속될 것이다. 많은 대학이 문을 닫을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군인 정치인’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학(私學)’이라는 떡고물을 얻어 대대손손 영예를 누린 지방 호족들이 세운 학교부터 사라질 것이다. 


물론 어른들이 순순히 보고만 있을 리 없다. 그들이 누구인가. 남의 놀이터를 썼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들에게 “도둑놈”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자들이 아닌가. 아직까지는 그들의 전략이 먹히는 듯하다. 어른들의 전략은 무엇일까. 돈일까, 권력일까. 그건 과거의 전략이다. 어른들도 진화한다. 이제 그들도 문화를 활용한다. 자존감(self-esteem)! 그들은 실업, 교육 실패, 아동 학대, 가정 폭력, 노숙자 등 시대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낮은 자존감’으로 돌리며 청년들을 어르고 달랜다. 거기에 세뇌당한 부모들이 우리 아이들에게만큼은, 이라는 이유로 ‘자존감’을 선물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이들이 “나는 사랑스러운 아이야”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이야”를 외친다. 이렇게 조작된 자존감에 게임, 아이돌 문화, SNS가 장착된다. 닭가슴 살을 먹은 허경완이 외친다. 아니아니 아니 되오~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 ‘자존감 세대’의 탄생은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적합한 인간을 양산하기 위한 어른들의 승리다. 교활하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른들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을 테니까. ‘자존감 세대’로 양육된 아이들이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현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나’는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음먹은 대로 바뀌지 않는 존재이고, 현실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겪은 청년들이 그대로 있을까? 폭력, 우울, 공황장애, 자해, 자살의 원인이 자신이 아닌 어른에게 있음을 알게 된 순간…… 어휴, 더 말하지 않으련다. 


여기, CJ라는 주인공이 있다. 빵과 커피를 팔고, 삼시세끼 밥을 지어먹고, 그러다 오디션 순위조작까지 감행한 그 대기업은 아니다.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윌 스토(Will Storr)가 488쪽이라는 만만치 않은 분량으로 탈고한 책에 등장하는 밀레니얼이다. 현실보다 SNS에 목을 매는 ‘셀피 중독자’로 살아가는 그는 수십만 장의 셀카를 보관하기 위해 저장 공간(cloud) 이용료를 내고, 사진을 보정하느라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알다시피 셀피(selfie)는 셀카로 찍은 사진을 곳곳에 올리는 행위를 말한다. “나는 소중해” “나는 행복해”라는 소리 없는 외침, ‘보정’으로 만들어낸 비현실적 셀카. 완벽한 자신을 상상하고 연출하는 자존감 중독, 바로 셀피다. 윌 스토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된다’고 믿는 밀레니얼의 극한 나르시시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셀피』에서 자존감을 끄집어낸다.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 자존감의 원뜻은 나무랄 데 없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갈구하는 자존감이 내 안의 성숙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게 아니라 타인들의 인정이나 칭찬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데 있다. SNS에 들러붙은 ‘좋아요’와 ‘하트’로 자신을 향한 사랑과 인정을 확인하는 사람들. 그건 이 글을 적는 나도 마찬가지여서 자존감이 아닌 타존감(他尊感)에 끌려 다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우리들 이야기다.


자존감은 ‘평판’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소문’에 민감해진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전해지던 시절은 그나마 나았다. 느렸고 파급력도 약했으니까. 지금은 아니다. 나보다 완벽한 삶을 꾸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셀럽’을 확인하는 지경이 넓고 깊어졌다. 빛과 우열을 다투는 전파 속도는 어떠한가. 그 결과, 모두가 힘들어졌다. 


『셀피』는 말한다. 우리가 힘든 까닭은 평판을 획득하기 위해 살기 때문이라고, 모두가 영웅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라고, 그냥 우리일 뿐이라고, 그러니 다른 사람의 선전을 믿지 말라고, 자신의 한계를 이해하라고, 분수에 맞는 목표를 추구하라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해준다.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과제에 시간과 노력을 쏟으라고, 자기 모습을 바꾸려는 시도를 그만두라고, SNS가 아닌 실제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일과 목표를 찾으라고.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뼈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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