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기 18
초고를 넘기고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나간 것 같다. 초고를 넘길 당시에는 지치기도 했고 이 정도 분량을 썼다는 것에 고무되어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넘겼지만 이렇게 유야무야 시간이 흘러가니 아쉬움이 남는다. (뭐 편집하면서 다시 볼 기회가 있겠지. 꼭 있어야 한다.)
나는 직업 에세이 시리즈 중에 한 권으로 들어가는 데 시리즈가 최근에 론칭했다. 출판사에서는 오랫동안 준비한 시리즈라 정신없으신 것 같았다. 책 뒷날개에는 곧 출간될 도서 목록에 내 이름도 있다.(출판사에 사진 찍어서 개인 SNS에 올려도 되는지 물어봐야겠다. ) 출간 예정 도서 목록은 10권이 넘었고 다양한 직업군이 있었다. 내가 4번째였다. 그래서 엄청 바쁘신가? 아직 내 초고를 검토할 시간조차 없으신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작년과 재작년에 정신적으로 살짝 힘들었고, 다른 데로 정신을 쏟기 위해 책 읽기,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힘듦은 너무 커서 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동력으로 쓰기에 딱 알맞은 크기였다. 당시는 피하고만 싶었던 고통이지만 덕분에 뜻하지 않게 책까지 쓰게 되었으니, 고통에 감사할 뿐이다. 책 초고를 넘긴 지금, 나의 주변 상황도 정리되어 작년에 비해 마음이 평온하다.
그런데 이 평온함은 순식간에 무료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종이 한 장 차이라고나 할까?어느 작가는 '무료함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사치'라는 표현도 썼는데 그래도 무료함은 무료함이다.
평온함인지 무료함인지 사치인지 구분은 안가지만 이 상태에서 뭔가를 한다면 그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돈 벌기 위한 일이나 집안일처럼 꼭 해야 하는 일은 빼고 말이다.
최근 나에게 소소한 기쁨을 준 일
1. 가족과 대화하기(남편과 같이 TV 보기, 딸이랑 동네 어슬렁 다니기)
2. 자전거 타기
3. 목적 없이 읽고 싶은 책 읽기(절대 기록 안 함)
4. 동네 산책하기
5. 맛있는 거 먹기
6. 멍 때리거나 낮잠 자기
7. 하늘 보기
8. 커피 마시기
그. 런. 데.
아쉽게도 소소한 기쁨 중에 글쓰기는 해당이 안 된다. 글쓰기는 동력이 필요한 것 같다.(지금 이것도 글쓰기 인가?ㅋㅋㅋ) 이렇게 아무렇게나 쓰는 글 말고 서론, 본론, 결론을 고려하는 글쓰기는 잘 써지질 않는다. 내가 글쓰기에 진심은 아니었나?
초고를 보내 놓고 시간이 지나가니 내 책을 낸다는 흥분도 점점 희미해진다. 이미 출간된 책날개에 내 이름이 나온 것도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된다. 좋은 것들은 처음에만 자극을 주고 금방 익숙해진다. 내가 가진 수많은 것들 중에서 익숙해지고 무뎌진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일상의 무료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감사할 수 있는 감각을 깨워야 한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좋아하는 책 실컷 읽고, 저녁에 딸이랑 아이스크림 들고 동네 어슬렁거리고, 남편을 이해하게 되면서 안 싸우고 평화롭게 지내고, 나를 힘들게 했던 친정 부모님이 지금은 잠잠하고, 한강에서 자전거 타는 것들은 오랜만에 여유와 행복을 주었다. 어디 멀리 여행 가는 것보다 훨씬 행복했다. 그런데 이렇게 한량 같은 생활도 오래 하면 무료할 것 같긴 하다. 사람의 마음은 왜 이리 다양한 갈림길로 뻗는지 행복하면서도, 무료하고...
시간이 빌 때 초고를 검토해도 되지만 피드백을 받고 고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혼자 더 보기도 애매하다. 바쁜 일이 빨리 지나가고 과장님이 나의 초고를 검토해 주시기를... 나의 책 출간도 진척이 있으면 좋겠다. 나의 무료함에 반짝 빛이 들어 오기를, 출간 일기에 익사이팅 한 소식을 마구 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무료함'이라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지혜를 개발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