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는 여전히 나에게 당연하고 편안한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웃집 친구를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면서 내가 속한 세계가 유일하다는 확신이 느슨해졌다. 좋은 사람, 좋은 삶을 위해 무조건 정해진 단 하나의 정치적 입장, 태도, 지식, 교육, 삶의 방식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은 멸종 동식물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나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면, 다른 무엇을 보호할 수 있을까.
숲속의 자본주의자/박혜운 235p.
글을 읽고 있자니 최근에 들었던 수업이 생각났다. 선생님은 동영상을 보여주시며 바뀌는 부분을 찾아보라고 했다. 남자와 여자 두 명이 포커 카드를 현란하게 깔면서 카드 몇 장을 뺐다가 넣다가 하는데 저 속에 무슨 트릭이 있을까 눈을 부릅뜨고 있는 도중 동영상은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무엇이 바뀌었냐고 물어보는 선생님의 말씀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다시 영상을 보니 남자의 옷과 여자의 옷 색깔, 카드를 깔던 책상보, 뒤편 커튼 색깔까지 바뀌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왜 지금은 너무나 분명히 보이는 많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까?’
‘사람이 이렇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일까?’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을까?’
충격에 머리가 멍해졌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이 많을수록 지혜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경험이 편견의 가림막으로 작용하여 눈을 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 나의 인식과 판단은 나의 고유한 경험으로 인해 왜곡될 수밖에 없고 남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타인에 대한 나의 판단, 남들의 나에 대한 시각, 나의 소소한 고민도 어쩌면 일정 부분 인식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나를 문제에서 조금은 떨어져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러한 틈들이 좀 더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