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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검 Jun 29. 2020

[역사] 1949년, 대륙 결전

공산당은 국민당을 어떻게 이겼나

다수지지를 얻고 소수를 반대하여 모든 적을 각개 격파하라.

 - 마오쩌둥




 국민당 군대는 왜 패했는가.


 초등학교 선생님은 국민당의 패배의 이유가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사실 '국민당이 왜 패했나' 이 질문 자체가 우리가 심정적으로 공산당보다는 국민당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싶어 한다는 반증이다. 냉전시대 대한민국과 중화민국(대만)은 마지막까지 좋은 친구였다. 1992년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하여 대만 사람들은 큰 배신감을 느꼈지만 이는 일본과 1972년에, 미국과 1979년 단교한 것을 비교해보면 꽤나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식민지 지배, 같은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서 급속한 경제 발전 경험,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의 도입 등 공통점이 많은 대만에 대해 한국 사람들 '중화인민공화국'보다 더 친근감을 느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중국 대륙을 둘러싼 전쟁의 승자는 중국 공산당이다. 지금의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공산당은 어떻게 국민당은 이겼는가. 공산당 군대(1927년 창립한 홍군,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꿈)는 어떻게 국민당군을 이기고 대륙을 장악했는가. 1937년 항일전쟁 시작 이전에는 열 배 이상,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이후에는 세배 이상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국민당 군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항공기 등 월등히 우월한 군사 장비를 보유한 국민당 군대. 1948년 초반까지는 공산당 근거지 연안과 장춘, 심양 등 동북 3성 포함 전 중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던 국민당 군대를 공산당은 어떻게 1949년, 불과 1년 만에 동북, 화북, 화중, 광동, 중경까지 중국 모든 지역에서 일거에 무너뜨렸는가.



[중국, 1945-1948년]


 1945년 일본의 덴노는 항복을 선언했다. 한국에서는 해방이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를 이 날을 '승전기념일'이라고 부른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장비로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은 일본군 대비 열세였지만 그래도 끝없는 대지를 무기로 후퇴와 지연 전술, 점령 면적이 넓어질수록 경계가 옅여지는 일본군의 배후 공격, 유격전 등을 통해 일본군을 괴롭혔다. 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군의 가장 큰 공로는 100만의 일본군을 중국 대륙에 묶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일본 본토 제외 51개 사단 중 인도차이나 반도(동남아)를 침공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사단은 12개뿐이 없었다니 중국의 거대한 토지와 인구 자체가 남이 따라올 수 없는 중국의 경쟁력이다.


 일본의 항복으로 중국 대륙에는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장개석과 모택동은 8월 28일 충칭에서 만나 향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미래를 결정할 담판을 시작했다. 장개석이 모택동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충칭담판은 큰 결과 없이 '국민당 정부를 중국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향후 모든 분쟁은 대화로 해결한다'는 원론적인 결론만을 내고 끝난다. 병력 조정 등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원하는 조건을 반영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장개석은 군사 작전을 개시한다. 공산군도 일본이 후퇴한 후 무주공산으로 남아있는 만주 지방을 확보하기 위해 만주로 급속히 병력을 투입한다. 1946년 국민당 군대는 북경, 장춘, 심양 등 일본군이 후퇴한 북방 주요 도시를 점령한다. 빠른 점령을 위해 병력 항공 운송이 전개되었다. 1947년 6월까지 연안, 심양, 장춘 등 화북 주요 도시 모두 점령한다. 하지만 점령 면적이 넓어질수록 공산군과 결전 위해 동원 가능 병력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일본군의 실패를 답습하고 있었다. 국민당군은 대장정 후 중국 공산당의 중심이 된 연안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대빨리 연안을 탈출한 공산군 주력은 보존된다.  



[1949년, 2번의 결전]


 반전은 동북에서 일어났다. 소련은 중국 공산당을 위해 만주에서 군사 장비를 공산군에 넘겨주며 서서히 후퇴한다. 공산군은 동북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한다. 가용 병력 수가 제한된 국민당은 넓은 동북 지방을 모두 점령할 수 없어 장춘, 심양 등 거점 도시를 우선 점령한다. 동북 지방에서 국민당은 점을(도시 중심 거점) 확보하고, 공산당은 면을(농촌 중심 영향력 강화) 가져간다. 동북 지방을 놓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첫 번째 결전은 북경과 동북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 진저우에서 벌어졌다. 공산군의 전투력을 줄곳 무시해오던 국민당 군은 만주의 일본군, 소련제 장비로 무장하고 전국에서 집결한 공산군과의 첫 번째 전면전을 치른다. 치열한 전투 끝에 국민당 군은 진저우 장악에 실패한다. 더 이상 공산군은 예전의 산속 게릴라 수준의 비정규군이 아님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진저우 장악 실패로 동북의 도시들은 고립된다. 모택동은 작전 방침을 关门打狗(문을 닫고 개를 잡는다)으로 정하고 고립된 도시를 포위 공격한다. 장춘을 본보기로 삼아 '봉쇄 및 아사 작전'을 실시한다. 모든 물자 출입을 봉쇄하고 일반 시민들의 탈출도 막아 장춘 시민을 굶어 죽게 만든다. 공산군의 포위 작전으로 장춘에서 근 30만 명이 아사자가 발생했다 한다. 장춘을 무너지자 심양, 하얼빈 등 동북 거점 도시들도 하나씩 무너졌다. 공산군의 북경 무혈입성은 장개석에게 충격이었다. 북경이 포위당하자 북경 사령관 傅作义푸쭤이(부작의)는 장개석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원인 딸을 통해 공산당과 협의하여 북경을 공산군에 넘긴다. 북경의 국민당군 20만 명은 이렇게 쉽게 무력화되었다. 국민당 군대는 이렇게 동북으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갔다. 공산당은 '평화로운 해방' 북경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남방지역 국민당 군의 항복을 종용했다.  


 두 번째 결전은 쉬저우에서 벌어졌다. 북경까지 공산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난징 바로 북쪽에 위치한 쉬저우는 공산군이 남방으로 진출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쉬저우에서 장개석은 다시 한번 결전을 시도한다. 국민당군은 진격했으나 장개석 직속 부대, 이전 군벌 군대가 혼합된 국민당 군대는 진격 속도가 각기 달라 전선이 계획대로 유지되지 않는 등 부실한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이전 군벌 소속 군대는 공산군을 돌파하려는 의지가 크지 않고 자신의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두 번째 전면전 쉬저우 결전에서도 결국 국민당은 패한다. 공산군은 난징을 점령한다. 상해 사령관은 상해를 중국의 스탈린그라드로 만들겠다면 결사항전을 공언하지만 잔여 병력 손실을 걱정한 장개석은 상해에서 공산군과 전투가 시작된 지 2주만에 상해 국민당군을 배를 통해 퇴각하도록 명령한다. 이후 공산군운 무한을 점령한다. 이제 남은 곳은 운남, 광동 등 남방 지역과 중일전쟁 국민당 임시정부가 있었던 중경과 사천 지역뿐이었다. 공산군은 중경으로 전진보다는 운남성 등 남방지역으로 점령하는 방식으로 중경 국민당 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홀로 남은 중경과 성도은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해방'된다. 장개석 성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날아간다.  



 [데자뷔, 1926-1928년]


 속절없이 무너지는 국민당 군.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니다.


 가용 병력이 7만 명에 불과한 초기 국민당 군대는 1926년 광저우에서 출발해 1928년 12월 북경에 무혈입성하여 2년 만에 중국 전역을 통일한다. 북벌의 기적이다. 북벌을 통해 장개석은 국민당 일인자로서 강력한 지도력을 구축한다. 1928년 북벌이 끝난 후 동북군을 포함한 100만 명이 넘는 국민당 군대는 명목상으로나마 장개석의 지휘를 받는다. 어떻게 이렇게 적은 숫자로 시작하여 북양군벌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북벌 중 여러 전투가 있었지만 분열된 북양군대는 국민당 북벌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편전쟁 이후 분열된 중국의 통일이라는 대의와 쑨원의 삼민주의는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듯한' 국민당 군은 새로운 중국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북양군벌 지역 민중들은 첩보 전달, 길 안내, 물자 수송을 적극적으로 수행했고, 각 지역 군벌들은 북벌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붕괴했다. 통일 중국의 밝은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여기까지는.


 문제는 국민당이 군세 확장에 치중한 나머지 초기의 이념의 순수성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부패한 군벌 타도를 위해 국민당 군대를 위해 봉사한 사람들은 군벌을 타도 후 새로운 정의의 시대를 염원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항복한 군벌을 국민단 정규군에 편입한 후 이전 군벌 장군을 그 지역 국민당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전 군벌들이 옷만 갈아입고 이름만 바뀌어 계속 같은 지역을 지배하는 것이다. 부정 부패와 착취는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말만 국민혁명군이지 이전과 달라진 점이 없다. 이 점을 공산당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국민당에 '신군벌'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국민당은 군사력에서 우위를 유지했으나 공산당과의 이념, 민심 확보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었다.


 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모든 무산계급자에게 나도 토지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 주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새로운 점령지에서 기업, 자산, 자원을 우선 확보하고 사유화하는 국민당 간부의 모습에 사람들은 실망했다. 민중은 점차 미래에 대한 희망을 공산당 쪽에 걸게 되었다. 국민당이야 말로 '반동'이라는 공산당의 선전은 민중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1928년 북양군벌이 속절없이 무너졌던 것과 같이, '반동, 신군벌' 국민당 군대는 1949년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 역전의 드라마,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1] 모택동의 각개격파 전략 


 적을 잘게 나누어 가장 약간 고리부터 끊는다. 각개격파 전략은 모택동이 장적으로 추진한 유효한 전략이었다. 어렸던 적 배웠던 북한 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이라 알지만 당시는 국민당과 반국민당과의 싸움이었다. 국민당은 부정 부패, 민중 착취, 경제 정책 실패로 민심을 잃고 수많은 반대 세력을 만들었다. 공산당은 반국민당 세력을 규합하여 국민당에 대항했다. 충칭담판에 있어 중국 공산당의 요구 조건은 '각 당파와 무당파 대표 인사들이 참가하는 정치회의를 소집한다', '각 당파에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였다. 이런 '통일전선전술'의 유산은 아직까지도 중국 정치체계에 남아 있다. 중국 최대 정치 행사 양회两会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뜻한다. 실권은 공산당 입법 의결기구인 전국인민대표대외에 있고 인민정치협상회의는 자문단의 성격만 가진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한 뒤 공산당은 '정치협상회의'에서 국민당을 배제한 채 새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할 것을 결정한다. 중국인민공화국은 엄밀히 말하자만 공산당이 아닌 공산당이 주도하고 (국민당이 배제된) 정치협상회의에서 건국이 결정된 것이다. 중국 민주 동맹, 중국 민주 촉진회, 중국 민주 건국회 등 국민당도 아닌 공산당도 아닌 '민주당파'는 오늘날 인민정치협상회의라는 이름으로 형식상으로나마 중국 정치체계에 남아 있다. 물론 모든 권력은 공산당에 집중되어 있다. 중국 공산당은 반국민당 연합의 대표로 국민당과 싸운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외연을 확장하며 국민당 내부의 분열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동국군 사령관 장학량, 북경 사령관 부작의는 국민당 총사령관 장개석의 명령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유리한 판단을 한다. 이는 모두 중국 공산당 선전과 조직운영, 협상의 대가 주은래의 집요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국민당은 구 군벌 등 내부 약한 고리부터 하나씩 깨어져 갔다.  


[2] 유리한 국제 정세


 실력이 좋은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중요한 일들이 인간의 노력이 아닌 제3의, 외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참 힘 빠지는 일이지만 역사에서는 흔한 일이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는 바로 조선을 형이라 부르던 여진족이다. 누르하치는 분열되었던 여진족을 하나로 통일하고 명나라에 억눌려 있었던 몽골의 지원을 받아 명나라를 공격한다. 당시 후금이라 자신을 칭하던 여진족은 객관적인 전력으로 명나라를 무너뜨릴 수준은 아니었다. 명나라는 후금이 오기 전 이자성의 난에 의해 스스로 무너졌다. 후금은 큰 손실을 각오하고 북경으로 전진했으나 전투 한번 없이 북경으로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명나라 잔여세력과 수십년의 전쟁으로 후금(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석권한다. 운과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한 후 심지어 공산당 고위 간부마저 '공산주의가 이기리라 믿었지만 내 세대에 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는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다' 고백했다고 한다. 1937년 2차 국공합작 이전 공산당 군대는 절대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에게 대전환의 기회는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 주었다. 장개석은 국민당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모택동이 이끄는 강서성의 공산당 근거지를 포위 공격하여 끝내 연안 구석으로 도망치게 만든다(대장정). 장개석은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을 통해 연안의 공산군을 공격하게 한다. 만주 고향을 잃은 동북군에게 대일 전쟁이 아닌 공산 '토비' 토벌이라는 임무는 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 장작림이 일본군에서 폭사당한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의 경우 더더욱 그러했다. 중국인은 중국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립적 군벌 세력을 포기하고 국민당을 선택한 그이다. 그런 그에게 같은 중국인 공산군을 토벌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동북군은 고향을 일본에게 빼앗긴 상태에서 공산군과 의미 없는 소모전을 계속하는 것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난징 국민당 정부에는 비밀로 하고 연안 공산군과 비밀 평화협정을 맺고 전투를 중단한다. 장개석은 공산군과의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서안을 방문하고 장학량은 눈물로 공산군과의 내전을 중단하고 항일공동전선에 나서자고 총사령관을 설득하려 한다. 장개석은 설득되지 않았고 이에 장학량은 서안사변을 일으킨다.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은 납치된 상태에서 공산당과 협의하고 공산당, 동북군, 당시 대다수 중국 민중의 바람대로 내전을 멈추고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한다. 홍군은 국민당 八路军팔로군이 되어 정식 보급을 받기 시작한다. 모택동은 역량 중 7은 공산당 선전 및 민심 장악에, 2를 국민당과의 교섭에, 그리고 다만 1의 역량만을 일본과의 전투에 쏟으라고 명령한다. 공산당은 1937-1945년 2차 국공합작 기간 중 세력 비약적 확장하였다. 모택동 8만 명 대장정 후 8천 명만 연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일전쟁 기간 중 홍군은 백만 명까지 성장한다. 국민당 보급 통해 포병, 전차까지 확보한다. 1945년 공산군은 예전의 산속 게릴라 군이 아니었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중국의 공산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중일 전쟁이 없었다면 공산당의 주력은 태평천국 운동처럼 중국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끝내 소멸했을 수도 있다. 기회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주었지만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중국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분명 공산당과 그 리더인 모택동의 역량 때문이다.


 두 번째 기회는 소련이 만주에서 만들어 주었다. 소련은 만주에서 고의로 퇴각 속도를 늦추며 전쟁 물자를 중국 공산군에게 넘겨준다.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은 충칭을 비롯한 중남부 지방에서, 공산당은 화북 연안, 섬서성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벌인다. 일본군, 소련군이 퇴각한 만주는 주인 없는 땅이었다. 만주 땅을 차지하기 위해 공산당, 국민당 군대는 앞을 다투어 진격한다. 공산군은 차량, 도보로 농촌 지역을 점령했고 국민당 군대는 항공으로 대도시를 점령했다. 모택동은 대역전의 전환점이 동북지역이 시작되리라 예측했다. 중국 대륙 내 국민당 병력 수는 300만 명에 육박했지만 대부분은 자기 점령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부정부패, 민중 착취, 각종 정책 실패로 국민당 군대는 반란이 두려워 점령 지역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연안과 화북의 모든 공산군이 동북에 집중하면 이 지역에서만큼은 공산군이 우월해진다. 여기서 전면전을 벌인다. 모택동은 탁월한 전략가였다.



[3] 사상가와 군인의 싸움


 모택동의 선전전 중시, 민심의 장악, 적의 분열 유도라는 각개격파 전략을 유효했고 국제 정세로 공산당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은 승리했다. 국민당은 우세를 지키지 못했고 공산당은 대역전에 성공했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리더 모택동과 장개석은 무엇이 달랐는가.


  모택동은 사상가이자 전략가, 그리고 뛰어난 선동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역사과 사상, 철학을 좋아했고 이를 현실 정치, 외교, 군사 이슈 연계하여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사상이 최우선으로 군사는 하위 개념임을 분명히 했다. 군사 우선주의를 당의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적 오류'로 정의하고 견제했다. 공산당 세력이 약할 때는 선전전 중심으로, 중일전쟁 당시에는 전쟁보다 세력 확장, 마지막 동북지역에서 우세가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드디어 전면전을 지시한다. 중국 공산당이 자랑하는 백단대전(항일전쟁 중 공산군이 승리한 전투)을 지휘한 팽덕회는 승전 이후 모택동에게 강하게 질책받고 자아비판을 하게 된다. 군사적 성과에 대한 욕심이 앞서 향후 있을 국민당과의 내전 승리를 위한 전력 확장 및 보전이라는 모택동의 장기 전략적 목표를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장개석은 본래 손문(쑨원)의 군사 고문을 담당한 군사 전문가였다. 장개석은 황푸 군관학교 교장 경력과 북벌 성공을 통해 국민당을 장악한 군인으로 모든 일에 있어 군사를 중심에 두었다. 정치, 외교, 경제는 군사적 승리를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는 이념의 순수성과 민심 장악보다는 군세의 확장, 새로운 지역의 점령과 군사적 통치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장개석은 전투가 끝나면 작전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하는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군사 중심주의에 빠진 국민당 정부는 민중적 지지 기반, 즉 사상을 잃었다. 북벌이 끝난 후 '지금은 전쟁 상태'라는 이유로 손문의 삼민주의는 국민당 정책으로 계승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토지개혁과 모두가 평등한 이상적 사회라는 비전을 보여줄 때(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어릴 적 한학을 공부한 장개석은 통일 중국에서 유교 등 전통 가치의 복원을 구상했다. 새로운 중국을 원하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다. 사상가와 군인의 싸움에서 승자는 사상가였다.


 1949년 상해 '해방' 이후 버스에 무임승차하는 공산군이 한 명도 없었다는 기사가 상해 신문에 났다. 시민들은 안심했다. 그리고 공산당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점령해갔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적을 분열시켜 각개격파하라는 모택동의 전략으로 대륙 결전에서 최후 승자는 공산당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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