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타이완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사건
타이완(대만)은 한국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본 식민 통치 : 타이완은 1895년부터 50년간, 한국은 1910년부터 35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다.
친미 자본주의 정권의 수립 : 해방 후 타이완에서는 장제스(장개석)의 중화민국 정부가, 한국에서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들어섰다.
개발 독재 : 타이완에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긴 37년간의 계엄령(1949년~1987년) 하 장제스와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의 개발 독재가 있었고, 한국에서는 박정희의 개발 독재, 신군부의 통치가 1987년까지 이어졌다.
미국의 영향 : 사회, 문화,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 교수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유학을 했고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많이 섞어 쓰는 것도 비슷하다.
유교 문화 : 중국 본토와 달리 이전 유교 문화가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도 비슷하다.
기타 : 전통적 유교 문화 영향, 일본을 통한 근대 문물의 유입, 강력한 장기 반공 독재 정권의 집권, 민주화, 미국의 영향 등 공통점이 많다. 이념에 따라 대륙(본토)과 타이완 섬, 북한과 남한으로 분리된 것도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 대륙이 타이완보다 인구는 58배 많고, GDP는 24배 커 절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면 남한은 북한보다 인구는 2배 많고, GDP는 대략 50배 많은 것으로 추정되어 남한이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타이완의 외교
중국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타이완의 '국가' 지위를 인정하는 국가와는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유엔에서 중화민국(타이완)은 미국의 도움으로 1971년까지 '전 중국을 대표하는 상임이사국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중소의 분열, 미중의 화해 모드 진입 등 국제 외교 지형이 변화에 따라 타이완의 국제 지위는 급속히 위축되게 된다. 1971년 10월 유엔 표결로 상임위원회 지위는 중국 대륙으로 넘어가고 미국이 제시한 유엔의석 보존안도 채택되지 않아 타이완은 유엔 회원국의 자격까지 잃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하나의 중국' 정책으로 타이완과 정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은 국가들의 숫자는 점차 줄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하나의 중국' 정책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정식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타이완과의 단교를 해야 함을 의미했다. 한국도 1992년 결국 중화민국(타이완)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 현재 중국 대사관 자리는 이전 타이완 외교관이 근무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대사관 건물에서 중화민국의 기가 내려가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기가 다시 올라가는 장면을 보고 많은 타이완 사람들이 분노했다고 한다. '끝까지 타이완을 지지할 것이라는 약속'을 한국이 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약속했던 바이다) 일본은 1972년, 미국은 1979년 타이완과 단교하였다. 현재 유럽에서는 바티칸 시국만이 유일한 타이완과의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이 타이완의 결정적 영향을 준 두 가지 사건
1) 한국 때문에 타이완이 식민지가 되었다면 믿겠는가?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운동이 발생하자 무능한 조선 정부를 이를 직접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고종은 청나라 군대를 불렀고 청나라 군대는 텐진 조약에 따라 일본이 이 사실을 알렸다. 일본도 군대를 파병하게 되고 조선 반도에서 청일 군대 간 긴장이 고조된다. 양국은 8월 1일 서로에게 선전 포고하고 육지에서는 평양, 바다에서는 황해에서 맞붙게 된다.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청나라의 일본 군대 간 큰 차이가 없었지만 훈련, 경험 등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1868년 메이지 유신 후 착실히 준비해 온 일본군이 우위였다. 일본군은 평양, 압록강에서 청나라 군대를 밀어내고 여순까지 진격하게 된다. 이때 일본군은 북쪽에서 여순으로 진격함과 동시에 동중국해에서는 타이완을 공격, 점령하게 된다. 1895년 4월 양국 간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지며 타이완은 정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대한제국이 망하게 되는 경술국치 (1910년) 15년 전이다.
2) 한국 때문에 타이완 섬이 공산화를 면하게 되었다면 믿겠는가? 장제스의 국민당은 1949년 대륙에서 패퇴하여 타이완 섬으로 오게 된다.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은 타이완 섬 공략을 위해 타이완 섬 맞은편에 집결하여 진먼(금문) 섬을 공격한다. 진먼은 중국 연안 도시 샤먼(하문)에서 4km뿐이 안 떨어진 섬이다. 육군 병력 수는 인민해방군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공군, 해군에서는 중화민국이 우위였다. 1949년 10월 인민해방군 9천 명이 진먼 섬을 점령하고자 하였지만 중화민국 군의 포격, 항공 지원으로 대부분 전사하고 만다. 인민해방군은 진먼섬과 타이완 섬을 '해방'하고자 다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한다. 반면 국민당 군대는 이 섬이 무너지면 정말 끝이라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타이완의 '공산화'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미국의 정책 변경이었다. 미국은 중국 대륙 전쟁에서 그토록 지원한 국민당 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국민당에 대한 어떠한 기대로 하지 않는 상태였다.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선언한 대공 방어선 '에치슨 라인'에는 한국과 타이완이 모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남한을 침공하게 되자(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미국의 정책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긴다. 유엔을 통해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함과 동시에 타이완도 지원하게 된 것이다. 타이완 수호 의지가 없었던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 태평양 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하여 대중 방어망을 공고히 다진다. 이번에는 한국 때문에 타이완 섬이 공산군의 침공을 면한다.
둘 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동학농민혁명군과 타이완 섬의 사람들과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테고,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의 공격 명령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타이완 섬 공격이 지체되리라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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