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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검 Nov 08. 2020

[역사] 항미원조, 중국이 보는 한국전쟁

伟大的抗美援朝战争,抵御了帝国主义侵略扩张,捍卫了新中国安全,保卫了中国人民和平生活,稳定了朝鲜半岛局势,维护了亚洲和世界和平。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의 확장을 막아내고, 신중국 안전을 지켰으며, 중국 인민들의 평화로운 생활을 보위하였으며,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켰으며,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유지하였다.


 2020년 10월 23일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주석이 항미원조전쟁(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중국에서 부르는 말) 70주년을 기념하며 한 말이다. 미국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항미원조 전쟁을 통해 결국 '미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내고 중국을 보호했다는 뜻이다.

 중국이 보는 한국 전쟁은 무엇일까. 우리가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중국 입장에서 한국 전쟁의 의미를 이해해보고자 한다.


한국 전쟁


 1950 북한은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전면 남침을 한다. 중국 공청단 교육자료에 중국이 북한의 남침을 부정한다는 기사도 있었지만(중국 공산당 청년조직 6·25 북한의 남침 아니다”,  2020.10.27) 북한이 전면적인 남침을 미리 준비하고,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쟁 발발 3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자던 국군은 패퇴를 계속했다. 1950 8월에 이르러서는 부산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사수하고자 했다. 9 15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유엔국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한다. 중국은 38선을 넘으면 중국군이 참전할 것이라는 경고를 수차례 보냈지만 이는 무시되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이루는 듯했다. 하지만 중국군 26 명은 어느새 국경선을 넘어 11 1 일제히 반격을 시작한다. 미군은 평양을 잃고, 포위당하여 후퇴하는 수모(장진호 전투) 당한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1951 1 4) 다시 찾는 (1951 3 15) 전쟁은 일진 일퇴를 거듭했다. 1951 7 10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전선은 교착된다. 이전의 38선과 유사한 군사 대치선이 만들어지자 유엔군과 중공군은 모두 전면전을 피하는 관망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이후  2년간 소규모 고지전만 지속되다가 1953 7 27 휴전 협정이 체결되게 된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전쟁이다.


항미원조 전쟁


 중국이 보는 항미원조 전쟁은 무엇일까. 중국 공산당의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그들이 부르는 이름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항미원조, 미국에 맞서 싸우고 조선(북한)을 돕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한국 전쟁을 동족상잔의 비극 등 내전으로 해석하지만 중국은 한국 전쟁을 '미 제국주의 침략'을 억제한다는 '패권주의 저지'의 틀로 이해한다. 우리가 그들의 논리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중국인의 머릿속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1839년 아편전쟁 이후 여러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의해 침략을 당해 반식민지의 치욕을 당한 중국은 미국의 참전을 '제국주의 침략'으로 해석하였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병합하고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를 점령했다. 6년 후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베이징, 상하이, 홍콩을 포함한 중국 대륙 점령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충칭으로 후퇴하여 항일전쟁을 지속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이다.


<1940년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 (위키피디아)


 마오쩌둥은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미 제국주의 군대'가 중국 본토에 들어오기 전에 한반도에서 이를 막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의 제조업 국가로 미국의 강철 생산량은 중국의 146배였다(미국 강철 생산량 8772만 톤, 중국 60만 톤). 신중국이 건설이 일 년이 갓 지난 당시 세계 최대의 경제력, 군사력을 가진 미국과의 전쟁을 결심하기는 쉽지 않았다. 마오쩌둥을 제외한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은 대부분 참전에 반대했다. 수차례의 당 중앙지도부 회의 끝에 중국 공산당은 '중공 인민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을 결정한다. 의용군이라는 이름은 참전을 '자원한 병사'의 의미를 강조한 말로 중국 정부가 직접적으로 군대를 파견했다는 느낌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다음을 고려할 때 해볼 만한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중일전쟁은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 공산당 내전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벌어졌지만 이번 싸움은 중국 땅이 아닌 조선 반도에서, 내전을 끝낸 신중국이 참전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게다가 소련의 장비 지원도 기대할 수 있다. (확전을 우려한 소련은 끝내 공군 지원을 하지 않아 제공권은 미군이 가져갔다) 제공권이 없더라도 수십 년간 국공 내전, 항일전쟁을 통한 중국 육군의 전투력은 미군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이는 중공군 참전 초반 사실로 드러났다. 중공군은 산악 지형에 분산하여 매복을 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병력을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했으며, 야밤에 꽹과리 소리 등 심리전을 이용하여 유엔군과 국군을 밀어붙였다. 중공군의 전략은 유엔군과 국군은 다시 서울 이남으로 밀어내는 등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불리한 결과를 가져다주었지만 중공군이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국군을 압박할 수 있다고 믿은 마오쩌둥의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대가가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총 60만에서 90만 명으로 추정되는 중국 참전 군인 중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을 포함한 18만 명이 사망했다. 1950년 겨울 개마고원 극한의 추위에 많은 중공군이 열악한 방한 장비로 동사했다. 참고로 국군(남한군) 사망자 수는 14만 명, 북한군 사망자 수는 52만 명, 유엔군 사망자 수는 4만 명 수준이다.



중국은 승리했는가?


 8월 15일을 우리는 광복절로 부르지만 중국은 전승절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종전 기념일로 부른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뜻이다. 2차 세계 대전에서 중국의 가장 큰 공헌은 일본군 100만 명을 중국 대륙에 잡아놓았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동남아,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 등 남방 지역에서 작전할 수 있는 병력은 크게 제한되었다.


 시진핑은 '항미원조 전쟁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승리'라고 말했다. 중국은 과연 한국 전쟁에서 승리했는가?


 중국의 항미원조 전쟁은 한국전쟁과 시작 시기가 다르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했지만 중국인이 보는 항미원조 전쟁은 1950년 11월 중공군이 개입했을 때를 시작으로 한다. 압록강에서 38선과 유사한 지금의 남북 경계선까지 미군을 몰아냈으니 중국인들은 이를 승리라고 부른다. 중공군의 참전 초반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후퇴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군이 능력이 없어서 다시 평양 및 이북으로 진공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 이상 확전을 바라지 않는 미국과 중국이 이전 경계선(38선) 수준에서 타협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당시 중국에는 핵폭탄이 없었고 핵폭탄은 전쟁의 양상을 바꿀 만한 충분한 위력이 있었다. 미국은 만주 지역에 핵폭탄 사용도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끝내 실행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 중국 본토에 핵폭탄을 통한 직접 공격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부담스러웠다. 중국도 38선 이하로 과도하게 공세를 펼칠 동기와 동력이 없었다.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의 절반을 나누고는 만족해했다.  


 외교적인 면에서 마오쩌둥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마오쩌둥은 이 싸움에 자신과 중국의 미래를 걸었다. 미국은 중국(의 일부를) 박살 낼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미국이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에 도박을 걸었다. 마오쩌둥은 무엇보다도 넓은 대륙과 넘치는 인구에 자신감을 가졌다. 미국이 중국 본토를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과거 일본처럼 끝내 패배하리라 생각했다. 외교전에서 배짱과 자신감은 상대방의 양보를 끌어내고는 한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는 핵전쟁을 불사하면서 소련을 밀어붙였고 결국 소련으로부터 쿠바에서 모든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양보를 얻어냈다. 한국 전쟁에서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적극적인 참전과 북한군 지원으로 미국을 이전 38선에서 만족하게 하였다. 당시 마오쩌둥의 판단으로 지금까지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비극이고 중국에게는 안전한 방어막(북한)의 확보이다.

 항미원조 전쟁의 '성공'으로 마오쩌둥은 대외적으로 '미국을 이긴 국가'라는 '명예'를 얻었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권력은 강화되었으며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중국은 미국과 소련 두 패권국가와 이를 지원하는 국가들을 제외한 나라들, 즉 '제3세계'의 리더를 자칭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아들 외에 잃은 것이 없었다.


 2차 세계 대전 후 유럽에서는 패전국 독일이 동서로 분리되었지만, 아시아에서는 패전국 일본이 아닌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군사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위도선으로 한반도를 분리했다. 남한과 북한에서는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존한 정권이 탄생하고 서로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남북 대립 속에 통일을 지향하는 김구, 여운형은 암살당하고 통일 세력은 급속도로 위축된다. 그 후 한반도는 지금까지 둘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국제 정세의 영향이 컸지만 그래도 민족 지도자와 국민들의 선택에 아쉬움이 있다.


 한국 뉴스의 '외신' 란을 보면 외국이 한국을 얼마나 훌륭하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소위 '국뽕'을 자극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반면 미국과 중국의 '외신' 파트를 보면 세계 다양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외교적 영향을 심도 있게 분석하는 내용이 상당히 많다. 그들은 우리보다 세상을 더 넓게 보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보다 세상을 더 넓게 보아야 한다. 그 첫 발걸음은 우리가 아닌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한번 바라보는 것이다.


관련 글

 : No China가 아닌 Know China

 : 중국과 미국이 전쟁을 한다면


참조 링크

 : 抗美援朝是新中国的“立国之战”

 : 习近平:在纪念中国人民志愿军抗美援朝出国作战70周年大会上的讲话

 : 중국 공산당 청년조직 “6·25는 북한의 남침 아니다”

 : 중일전쟁 지도 (이미지)

 : 한국전쟁 사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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