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화가의 농간으로 흉노인의 처가 되다
'흉노인의 처'가 된 왕소군(王昭君)
전한의 원제 시대 이야기이다.
사진을 찍을 수 없던 당시 후궁들의 초상을 그리던 궁중화가 모연수가 있었다. 그는 후궁들에게 뇌물을 받아 그림을 이쁘게 그려주던 부패한 인물이었다. 왕소군은 그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고 그는 일부러 왕소군의 초상화를 못생기게 그리고, 추한 점까지 하나 찍었다. 그녀는 입궁한 지 5년 동안 황제를 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서경잡기]에 따르면 흉노 왕 중 하나인 호한야 선우에게 보내는 여성을 고를 때 황제는 초상화 중 가장 추했던 왕소군을 선택했다고 한다. 왕소군이 황제에게 이별을 알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사달이 났다. 황제는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감탄했다. 그녀를 보내기 싫었지만 이미 약속한 바가 있어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황제는 화가 모연수를 참형에 처한다.
이후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와 결혼하여 3년 동안 같이 살며 아들 하나를 두었다. 호안야 선우가 사망하자 흉노의 관습대로 호한야 선우의 장남인 복주류약제 선우의 처가 되어 11년간 함께 살면서 두 딸을 둔다.
춘래불사춘
많은 후대 시인들은 그녀의 심정을 노래했다. 그중 서도 동방규의 시가 유명하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왕소군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자연히 옷의 혁대가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야윈 몸 때문만 아니라네.
실제 왕소군의 심정을 전하는 글은 없다. 하지만 호한야 선우가 죽고 나서 한나라에 복귀를 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올해도 꽃과 풀이 있는, 봄 다운 봄이 다시 돌아왔다. 왕소군이 그토록 원하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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