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삶이 버거울 때, 나는 약을 찾듯 책을 찾았다

by 책약국

약을 찾듯 책을 찾는 사람


맞벌이 부모님 아래 태어난 외동아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늘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건 책장 속 책들이었다. 심심할 때 늘 책을 찾았기에, 현실보다 책 속 세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책 속의 위인들을 만나 꿈을 키웠고, 책 속으로 모험을 떠나는 게 가장 즐거운 놀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늘 찾고 따르던 게 책이어서일까?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나에게 가장 의지가 되는 건 언제나 책이었다. 아플 때 병원을 찾듯, 삶이 어렵고 버거울 땐 친구나 부모님보다도 먼저 책을 찾았다.


아픈 곳에 따라 병원을 달리 가듯 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내가 지닌 물음과 나아갈 길에 대한 단서는 책 속에 있었다. 사람에 치이면 인간관계와 관련된 서적을, 내 말솜씨가 성에 안 차면 화법책을, 문득 불안이 찾아들면 심리나 철학 관련 책을 집어 들었다. 그냥 모든 일상이 지칠 땐 소설이나 에세이에 폭 안겨 현실을 잊기도 했다. 책은 삶에서 길을 잃었을 때 가장 좋은 길잡이이자, 삶의 버거움을 잊는 데 가장 좋은 처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약을 찾듯 책을 찾아온 삶일지라도 미처 몰랐다. 책이 정말 약이 될 때가 오리라고는. 내가 정말 병이 들었을 때도 약 대신 책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이다.



어느 날 나를 찾아온 미지의 질환, 책이 정말 약이 됐다


지난 3년간 내 삶은 성난 바다처럼 요동쳤다. 명확히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대학병원을 수시로 드나들며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병명 하나를 제대로 확정 짓기 힘들었다. 나의 병은 백과 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회색지대를 떠도는 모양이었다.


제멋대로 날뛰는 장기를 잠재우려 택한 약은 복용 시 다양한 부작용이 우려됐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침마다 고용량의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면 부작용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매일 같이 삼켜나가는 약들이 오히려 불안을 키우며 나의 정신을 병들게 했다. 그때도 난 약을 찾듯 책을 찾았다. 불안한 나를 바로 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당시 정처 없이 책과 책 사이를 헤매던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자타가 공인하는 승부사 배구선수 김연경의 에세이 <아직 끝이 아니다>였다.


도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여자배구 팀이 끈질긴 집념과 투혼으로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달성한 때였다. 선수들이 숱한 부상과 짙은 패색에도 매 순간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경기에 임할 수 있는 원동력이 궁금했다. 절망의 순간에도 승리를 꿈꾸고 실현해 온 이의 삶이 오롯이 담긴 책이라면, 나를 이 불안에서 구원할 일말의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예감은 적중했다. 책은 불안의 구렁텅이에서 다시 한번 나를 건져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환자가 아닌, 평범한 일상을 사는 한 사람으로 나를 되살렸다.


사람들은 김연경 선수가 무릎 문제로 인해 18살의 어린 나이부터 3년 연속 수술대에 올라야 했단 사실을 잘 모른다. 슈퍼루키로 화려한 데뷔를 하자마자 겪게 된 시련이었다. 무릎 수술로 인해 배구 선수로서의 커리어 자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도 최정상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멋진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김연경 선수는 불안한 미래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낸 것이 비결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무릎에 연골도 많이 없고 잦은 부상에 몸도 예전 같지 않지만, 자신의 상태에 맞는 철저한 관리와 훈련으로 기량을 유지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래의 일들은 그럴 수도 있는 가능성일 뿐이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_45
나는 매 순간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절망하기보다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며 노력해 왔다._123~124


그런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병은 이미 생겼고 약의 부작용은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부작용은 그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아무리 몸을 잘 관리해도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날 수 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저 최대한 약의 부작용이 덜 하도록 나를 철저히 관리해 두는 게 지금 당장의 최선이었다. 만약 부작용이 생기면 그때 가서 해결책을 찾아볼 일이었다.


책을 읽은 뒤 내가 손댈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신경을 끄고, 그저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식단을 관리하고 운동을 하며 나타난 긍정적인 변화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고 있었다. 불안한 미래 속을 헤매는 대신, 나는 그저 오늘을 살게 됐다.


결국 미지의 병으로 생이 위태롭다 느낄 때조차 나를 치유한 건 약이 아닌 책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책의 처방을 믿고 따른다. 책이 내 삶의 상처를 아물게 하며 결국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 그래서 난 오늘도 약을 찾듯 책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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