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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Aug 16. 2023

반나절동안 한 일

텀블벅 펀딩 관련 거래처에 가야 해서 오늘은 일찍 일어나야 했다. 알람을 많이도 맞춰놓았는데, 능수능란하게 다 꺼버렸다. 여덟 시 넘어서까지 침대에 누워서 늦장을 부리고 있으니 율무가 와서 어서 밥 달라고 잔소리를 하고, 매트리스 끝 튀어나온 내 발 쪽에서 왔다 갔다 하며 간지럼을 태웠다. 아무렴, 머리도 감아야 하니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일어났다. 급하게 씻고는 고양이용 유산균을 습식캔에 섞어 율무 밥을 챙겨주었다. 밥을 먹고 있는 율무를 뒤로 하고 집에서 나왔다. 전철을 타고 동대문종합시장으로 향하는 중에도 몽롱했다. 요즘 내 최애 아이돌인 NCT Dream 노래를 들으며 없던 흥도 만들어 정신을 깨웠다.


실크집 앞에서 우리 팀 “안팎”의 디자이너인 가든이(별명)를 만났다. 헤어 스크런치에 쓸 천을 사야 해서 지난주에 미리 실크 원단집에 연락을 해둔 터였다. 가게 안에는 사장님이 안 계셨다.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우리를 보고는 주변 가게 사장님께서 우리 소식을 전하셨는지 원단 집 사장님께서 내게 연락을 해주셨다. 생각보다 출근이 늦어진다고 하셨다. 근처 호텔에 딸린 카페에 가서 음료를 두 잔 시키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작업한 책 결과물 파일을 가든이가 노트북으로 보여줬다. 구글 드라이브로도 보던 거지만 함께 보니 또 감회가 새로웠다. 글을 쓴 사람도, 책을 진짜 책으로 형상화한 사람도 책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그저 신기해했다. 우리가 같이 책을 만들었다는 게 진짜 안 믿겼다.


이런저런 대화를 두런두런 나누다 보니, 감독이자 배우인 그레타 거윅이 내한 당시 잡지 코스모폴리탄에서 한 인터뷰도 떠올랐다. 영화 <바비>의 주연인 마고 로비가 제작자여서 그레타는 최종본이 아닌, 용접 중인 조각을 영화 주연에게 주어야 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다 만들지도 않은 조각들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아주 멋진 한 권의 책이 나올 거라고 말하고 다녔던 내가 떠올랐다. 책 홍보란, 현재의 내가 열심히 책을 알리는 만큼 미래의 내가 부담을 가지게 되는 일이었다. 디자이너 가든이의 손으로 책 표지가 멋져지고, 텀블벅 펀딩 상세페이지가 다채로워지는 동안, 실은 내가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되어가는 중은 아닐까 경계했던 때도 떠올랐다.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는 내가,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맞게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크 원단집에 다시 갔더니 사장님이 자리에 계셨다. 우리가 점찍어놓은 실크 원단에서 광채가 났다. 심지어 가볍기까지 해서 헤어 스크런치(곱창끈)에 쓰일 원단으로는 제격이었다. 공장에 샘플로 가져갈 원단 반 야드를 사장님께 부탁드려 조금 샀다.(원래는 이렇게 조금씩 팔지 않는다.) 물에 빠져서 걷고 있는 느낌이 드는 바깥의 습도를 피해서 택시를 타고 뽀송뽀송한 상태로 공장에 도착했다. 원단을 사장님께 맡겼더니 금방 헤어 스크런치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이젠 발주만 넣으면 헤어 스크런치 관련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다. 홀가분했다. 든든한 마음도 들었다.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진 안광이 내 눈에도 비쳐서였을 거다. 나도 본업을 할 때 생기 있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얼마간은 슬펐다. 가드니와 둘만의 오붓한 점심식사 겸 회식을 하고, 다가오는 9월 출판기념회가 열릴 부비프책방 사전 답사도 다녀왔다. 어제 이 시간쯤엔 침대에 누워 지루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일을 해야 이렇게 신나버리고 마는 걸 보면 난 어쩔 수 없는 워커홀릭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일이 너무 재밌어서 원래 일은 그만두고 싶어질까 봐 무섭기도 하고 그랬다. 잊어버리기 전에 반나절동안 한 일을 후딱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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