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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왔다 율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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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Sep 21. 2023

9월 어느 날의 일기

새벽같이 일어나 파주 인쇄소에 가서 새 책 감리를 보고 왔다. 사실 봐도 무얼 봐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열심히 보는 척만 했다. 그래야 인쇄소 직원 분들이 내 책을 더 공들여서 인쇄 작업을 해주실 것 아닌가 싶었다. 왼쪽에 가서 두리번거리고 오른쪽에 가서 신기한 인쇄기계가 돌아가는 원리를 영상으로 한 번 찍고. 머쓱하게 바퀴 달린 가구가 이동하듯 로봇청소기 흉내를 열심히 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멀뚱히 서있다가 왔을 뿐인데 너무 피곤했다. 왜 피곤한지를 생각하다가 에어컨과 선풍기를 동시에 틀어놓고는 금방 추워져서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냉방 기계를 조작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서였다. 당장 모레면 출판 파티도 있고, 책도 다 만들었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왠지 서운한 기분이 든다. 이 작업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의 비어있는 시간에는 무얼 해야 할지에서 오는 공허함 때문일까. 왜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기분이 푸슝- 가라앉는지 모르겠다.


한숨 자고 나니 기력이 조금 생겼다. 배달의 민족 앱을 켜서 과일이 듬뿍 들어있는 요거트아이스크림을 시켰다. 천도복숭아, 털복숭아를 섞어서 시키면 맛있는데 천도복숭아 철이 끝난 건지 앱 메뉴에서 천도복숭아 체크 버튼이 사라졌다. 또 왠지 서운한 기분이 든다. 상대를 알 수 없는 서운함이다. 비슷한 경도로 씹을 수 있는 사과로 대체했다.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율무랑 놀다 보면 기분도 금세 좋아지고 글방에 참여할 시간이 되어서 사람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오늘 하루도 가겠지. 시간을 빨리 보내 어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나를 바라보는 율무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하염없이 천천히 흐르길 바라게 된다. 고양이의 시간은 사람보다 4배나 빠르다는데, 주인이 이런 몹쓸 생각을 해서야 되나. 카세트 빨리 감기 버튼을 얼른 재생 버튼으로 바꾸듯 율무의 털을 머리부터 꼬리까지 쓰다듬어 본다.


아 참, 율무는 얼마 전 암이 아니라는 조직검사 소식을 받았다. 종양이 여섯 개나 있는데 암이 아니라, 모두 유선 결절과 지방종이라니. 0.0001%를 율무가 해냈다. 조직검사 결과를 더 자세히 봐야 해서 검사 결과 소식이 늦어질 거라는 병원 문자를 받고선 내심 기대했다가 다시 마음도 접었다가 또 기대했던 2주였다. 악성이라면 결과를 더 자세히 볼 것도 없을 텐데, 보이는 게 없어서 더 자세히 봐야 하는 거 아닐까? 같은 희망을 마음속에 꼭 쥐고 있었는데. 그게 현실이 되었다. 오래 준비한 대학원 발표수업을 해야 하는 날, 하필 택시기사님의 초행 영업을 함께 하게 되어 대학원에 10분 늦었던, 유광코팅으로 주문했는데 무광코팅으로 내 책이 후가공되어 나온 일 따위의, 놓쳐온 운을 끌어모아 율무에게 기운이 전해진 걸까. 율무 담당 의사 선생님께는 위급한 수술을 위주로 하는 2차 병원에서 보호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이 흔치 않을 텐데 그 운을 우리 율무에게 써주신 것 같아 감사하고 또 다른 분들께 괜히 죄송스럽다는 말을 전했다.


일기로 써보니 이번주는 피곤할 법도 하다. 격하게 기쁜 일이 있었으니까. 동요 ‘퐁당퐁당’처럼 소소한 나에겐 베토벤이 지휘하는 태풍 같은 한 주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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