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OFF's <연말정산> 중에서
-1월-
환승연애2는 매워도 너무 매운맛의 프로그램이라 보기를 미루고 있었다. 글방 친구들은 물론이거니와, 인터넷 세상에서도 온통 환승연애2 이야기뿐이라 '대체 얼마나 재미있길래?'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결국 유료 결제를 했다. 미용티슈로는 내 쏟아지는 콧물과 눈물을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집에 있는 3겹 두루마리 휴지에 눈물, 콧물을 묻혀 산처럼 쌓고 치우길 반복했다. 가장 아픈 연애를 했던 지난 연인과 저 프로그램에 같이 나온다면 어떤 웃기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상상을 해봤다. 끔찍했다. 저리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도 사랑을 하면 지질해지는구나 싶어, 괜히 웃음도 나왔다. 지나간 연인과 한 집에 사는 관찰 예능에 출연하는 이들의 강단이란. 정말 대단한 것일 테다.
나: 못해 못해.
환승연애 제작진: (황당) 하자고 한 적 없는데요.
-2월-
새해의 첫 달은 늘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지나간다. 그래서일까. 2월은 유독 허름한 날이 쌓이는 달이다. 헛헛할 때마다 켜게 되는 루미큐브만 하다가는 금방 헌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말해보카' 어플을 깔았다. 레벨업을 무진장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12월, 그때 외운 단어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다. 곧 다가오는 2월엔 뭐 하지.
-3월-
배구황제 연경언니 덕질을 한 달이었다. 흥국생명 경기 직관을 보러 인천 삼산월드체육관까지 직접 갔다. 연경언니 팬이 진짜 많았다. 방구석에서 배구를 볼 때는 내가 제일 열성 팬인 줄 알았는데, 직관 응원석에서는 제일 체력이 떨어지는 한 사람에 불과했다. 나보다 키 크고 다리가 긴 배구선수 여성 분들을 보면서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내가 늘 키가 큰 편이라, 나보다 키 큰 친구가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면 엄청 든든한 마음이 들 것 같아서였다. 연경 언니가 내 자리 쪽으로 올 때마다 고라니처럼 소리를 질렀는데 부끄럽진 않았다. 나 같은 고라니 팬들이 많아서였다. 중계에 찍히진 않았겠지.
-4, 5월-
반려묘 율무의 집사가 되었다. 허망한 생각이 드는 밤이면 율무가 내 곁에 왔다. 고양이는 슬픔의 냄새를 맡는다고 하던데, 그로 인해 예민한 고양이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고양이 유튜브에서 봤더랬다. 울음을 꾹 참고 있다가 이불 속에 들어가 울곤 했다. 냄새가 이불 밖으로 새어나갔는지, 한밤중에 몸을 뒤척이다 문득 따뜻하고 물컹한 털북숭이가 내 종아리 곁에서 느껴졌다. 그렇게 율무가 나를 돌봐주는 밤이 종종 있었다.
-6, 7월-
외롭다는 이유로 사람을 만나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땐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는데, 이번엔 내 글로만 채운 책을 독립출판으로 내보기로 마음먹었다. 2021년부터 일주일마다 한 편씩 쓴 글이 있어서 독립출판을 결심하자마자 행동할 수 있었다. 브런치에 올려둔 글을 모두 긁어 한글파일에 하나로 모았다. 퇴고하고 제목을 지었다. 이 책 다음의 책은 어떤 제목을 가지게 될지 벌써 궁금해졌다. 그러기 위해선 계속 써야 했다. 독립출판을 하는 와중에도 꾸준히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달이다.
-8월-
전세 재계약을 했다. 계약서를 집에 들고 와 율무에게 보여줬다.
"우리 여기서 더 살 수 있어. 집사 잘했지?"라고 말했던가.
-9, 10월-
두 달 병가를 썼다. 그 와중에 고양이도 아파서 사람 병원도 고양이 병원도 왔다 갔다 하느라 바빴다. 또 그 와중에 책 펀딩도 하고, 다행히도 큰 인쇄사고 없이 책을 1000부 찍고, 책방에 입고도, 출판파티도, 전국 각지의 북페어 참가도 했다. 쉬어도 집에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오히려 마음이 낫는 데에 도움이 됐다. 덕분에 잘 돌아갈 수 있는 마음 근육이 생긴 달이었다.
-11월-
짧은 짝사랑이 피고 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짝사랑보다 흠모에 가까운 감정이 아닐까 싶다. 좋아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게 쉽지 않았다. 나도 좀 우아하고 세련되게 짝사랑을 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내 짝사랑 이야기 도입부만 들어도 대리수치를 느끼는 친구들의 표정을 보니 그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다.
-12월-
집에 혼자 있다간 수치사 에피소드만 늘어갈 거 같아서 여기저기 밖으로 쏘다녔다. 인스타그램 피드만 보면 굉장한 자기 계발을 하는 현대 여성처럼 보인다. 실로는 주의를 딴 데로 돌려 짝사랑이 부활하지 않도록 애쓰는 중이나 이렇든 저렇든 뭐가 중요한가. 지질해지지 않으려는 와중에 멋져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인 것을.
*이 글은 DAY-OFF(@the_dayoff)의 <연말정산> 월별 키워드 페이지에서 영감을 얻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