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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Dec 21. 2023

쉬는 시간

우리 반 아이들은 쉬는 시간을 기가 막히게 챙긴다. 올해의 아이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맡아온 반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 자신의 권리임을 응당 알고 있다. 학년 초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담임교사인 내가 늘 강조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에 잘 쉬고 공부 시간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쉬는 시간 종소리를 들었음에도 가만히 앉아 수업 때 마치지 못한 과제를 계속하고 있는 학생을 보면 나는 다음 시간에 시간을 더 줄 테니 일단 쉬라고 말한다. 물론 공부 시간에 놀다가 뒤늦게 과제를 시작한 학생은 예외로 치지만. 쉬는 시간을 잘 쉬어야 건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가 이미 그 반대의 경우를 베타테스트로 살아보아서 안다. 쉬는 시간에 안 쉬면 십 년도 못 가서 마음에 병이 난다는 것을.


난 정말 지독한 학생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사립고등학교였고, 약 20년 전인 그 시절에도 공부를 꽤 잘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은 과목별 개인 과외를 받거나 주요 과목 학원을 다녔다. 우리 집은 학교에 낼 돈을 내는 것도 힘든 형편이었기에, 나는 학원을 다닐 수 없었다. 정말 열심히 일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 가난이라는 걸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를 탓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 팔자니까 셀프로 펴야 했다. 전략은 하나였다.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 무작정 단어를 외우고, 주말엔 누구보다 빠르게 교실 컴퓨터를 차지해서 EBS 무료 강의를 들었다. 나보다 조금 더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푸는 문제집 이름을 몰래 봐두었다가 따라 사서 연습장에 풀었다. 틀리지 않을 때까지 여러 번 풀어야만 문제집을 버릴 수 있었다. 수능이 끝난 선배들이 버리는 문제집을 주워두기도 했다. 뭘 하더라도 '지금' 열심히 부끄러워야 나중에 어른이 되어선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쉬는 시간은 사치품이었다. 어차피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나눌 이야기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내가 가진 이야기는 친구들의 쉬는 시간을 방해할 터였다. 오전 수업 종료를 알리는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급식실로 전력 질주했다. 밥을 마시듯 먹고 교실에 문제집을 챙겨 심화반 교실로 올라갔다. 1학년 말이 되어서야 겨우 들어간 심화반이었다. B반에 들어갔을 때는 기분이 좋았지만, 성적이 더 올라가서 A반으로 올라가고 나서는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A반 특별 수업 내용을 따라갈 수 없어서였다. 모두가 끄덕이는 사이에서 나는 아는 척을 하고 앉아있다가, 나만 빼고 다른 친구들은 다 풀어낸 문제를 쥐고 점심시간에 씨름을 했다. 학교 스피커에서는 원더걸스의 노래 "Irony"가 나왔다. 결국은 끝까지 풀지 못해 마음이 우울해질 때는 모의고사, 내신을 종합한 성적 1등이 앉는 1번 자리에 몰래 앉았다. 친구들과 쉬이 어울리면서도 성적이 높은 친구의 자리였다. 부럽다,라고 생각하면서 창밖을 가만히 바라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유일하게 쉬는 순간이었다.


호들갑은 온통 떨면서 공부를 해놓고선 정작 수능은 망쳤다. 울렁증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는 컴퓨터가 없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담배 냄새가 뿌연 PC방에 동생 지용이와 함께 갔다. 게임에 열중인 사람들 틈에서 수능 가채점을 했다. 평소보다 40~50점 정도가 낮은 점수였다.(동그라미가 대부분인 시험지를 들고 엉엉 우는 나를 보고 동생은 의아해했다.) 어린 마음에 내 컨디션을 탓했지만, 사실 지금은 그것이 변명이라는 걸 안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기가 막히게 알고 수능출제위원들이 문제를 낸 것이니, 내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다. 가채점을 하다 알게 된 건, 정작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랐다는 거다. 쉬지 않고 전략 없이 공부만 해서 어떤 대학, 어떤 과를 가고 싶은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내신도 모든 과목이 적당히 좋고, 수능도 적당히 잘 친 나는 교대에 가기 좋은 결과를 받아 들었고, 엄마의 오랜 바람대로 교사가 되었다.


교사가 된 지금, 나는 학생들에게 쉬는 시간을 가장 먼저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잘 쉬어야 공부도 일도 잘하는 거라고, 어쩌면 학생들에게는 아득할 미래의 일을 상상해 보도록 한다.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열심히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먼저 챙겼으면 좋겠고, 다른 사람의 말보다 스스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인간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렇게 학생들에게 잠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함을 알려주다가 나도 쉬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숨이 차도록 바쁘지 않아도 살아지는 거라고. 쉬는 시간을 기가 막히게 챙기는 우리 반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얼마간 안도한다. 쉬어가는 아이들에 맞추어 나도 어느새 느려지고 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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