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방학을 했다. 미리 꺼놓지 않은 알람 때문에 삼일을 일찍 출근시간에 깼다. 잠결에 화장실에 갔다가 아침약을 먹고 반려냥 율무를 한번 쓰다듬고는 다시 이불속에 파고드는 게 방학 후 아침 루틴이다. 엊그제, 어제와 달랐던 오늘 추가된 한 가지 일은 알람을 끈 거다. 내일도 이러다 얼결에 일찍 일어나기는 싫어서다. 한밤보다 이른 아침에 더 깊은 잠을 자는 편이다. 예전엔 일터에 지각을 하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출근시간을 지켰는데 요즘엔 카풀을 해주시는 동료 선생님 차를 얻어 타려 요 습관을 꽤나 고쳤다. 방학 때는 부러 깨어있을 필요가 없다. 다시 잠을 청하려 이부자리를 쓱쓱 손으로 쓸다가 발견한 핏자국. 얼마 전에 자다가 목구멍으로 피가 꿀떡꿀떡 넘어가기에 일어났더니 코피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는데, 아마 그때 흘린 자국인가 보다. 잔뜩 쌓인 화가 코피로 나와 풀리는 거라면 코피는 언제나 대환영일 텐데, 머리만 더 아프고 화병 증세는 그대로다. 코피가 묻은 겨울이불은 집에 있는 작은 세탁기에 욱여넣을 수도 없다. 반이나 들어가려나. 정신이 차려지는 어느 날에 집에서 애벌로 손빨래한 이불을 둘러메고 한 블록 건너 코인세탁소에 다녀와야겠지. 아구 귀찮아라.
어제오늘은 글로 쓰기엔 미운 사람들만 잔뜩 떠오르는 날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기록하고 기억하기에 가치가 없기에 글로 쓰고 싶지 않다. (구) 트위터 (현) X에서 본 피드인데, 안 좋은 일만 자꾸 떠올리면 부정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능력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내 인생이라는 시나리오에서 대사를 주기엔 미미한 존재의 사람들이니, 예쁘지도 않은 사람들은 글로 쓰지 않기로 한다. 대신 방학 때 해야 할 일들을 ‘할 일’ 앱에 정리해 보았다. 집 청소, 율무 화장실 모래 교체하기, 출산 등의 이벤트가 있는 친구들에게 그동안 놓친 선물 보내기, 설날 때 엄마 깜짝 놀라게 할 용돈봉투 사기(이번엔 세금 고지서 모양 봉투를 사기로 했다.), 오랫동안 연락 안 하고 지낸 사람들에게 목소리 전하기, 방구석에 던져두었던 기타 치면서 노래 연습하고 녹음하기, 안 쓰는 물건 당근마켓에 팔기, 대출금리 낮은 것으로 바꾸러 은행 가기, 피부과 가서 뾰루지 흉터 없애기, 같은 것들. 이 글을 쓰다 보니까 어째 할 일이 더 늘어난 느낌이다. 방학이 부족할 것 같다. 이번 방학 때는 큰 변수가 없다면 근무지도 바뀌기 때문에 학교에 있는 짐을 전출학교로 모두 옮기는 교실 이사도 해야 한다. 할 게 많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함께 오래 근무한 5학년 동료 선생님들과의 쫑파티가 있었다. 문득 선생님들과 함께한 지난 3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실 다른 선생님들이 느낀 내 첫인상은 정말 별로였을 거다. 내가 근무하길 희망하는 학년은 5학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월 출근일, 학교에 나가보니 나랑 친한 선생님들은 모두 4학년에 배치가 되었는데 나만 5학년이 되어 있었다. 잔뜩 뿔이 난 상태로 5학년 교사실에 갔다. 나를 반겨주시는 선생님들 앞에서 나는 하나의 웃음기 없이 딱딱하게 있었다. 2021학년도 1학기는 교사실에 거의 가지 않고 교실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교사실에 와서 함께 차도 마시고 간식도 나눠먹자고 하는 선생님들께는 그러겠다고, 형식적인 대답만 할 뿐이었다. 넉넉한 마음을 지닌 선생님들은 나와 잘 지내보려 수를 내셨다. 그건 바로 나와 가까운 곳에 사는 J선생님께 카풀을 해줘 보라고 한 것이다. 과연 누가 예의 없는 후배교사를 챙기고 싶겠는가. 그럼에도 수차례 제안을 하셨고 나는 곧장 거절했다. J선생님은 그러면 퇴근할 때라도 같이 가자고 설득을 하셨다. 춥고 더운 날씨에 자가용의 쾌적한 맛을 한번 보면 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J선생님의 탄탄한 가설이었다. 그녀는 옳았다. 그렇게 은혜로운 카풀을 하면서 교사실에 띄엄띄엄 놀러 가기도 하다가 나는 어느새 교사실의 NPC가 되어있었다. 그러다 학년부장도 하고, 3년을 내리 5학년 담임을 했다. 돌아보면 그저 동료 선생님들이 좋아서였다. 선생님들과 헤어질 게 막막하다. 쫑파티에서는 “상상 그 이상”이라는 상장을 받았다. 학생 때나 받던 상장을 선생님이 되어 받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 사람의 노력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난리와 호들갑을 떨며 박수를 쳐주는 동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일단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지. 그러려면 방학을 알뜰살뜰히 보내야 한다. 그것이 곧 나의 방학 숙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