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okphoto Jan 25. 2024

미루어뒀던 작별인사를 보내며

우리 가족이 그 집에서 사는 동안 강산이 두세 번은 바뀌었을 거다. 유치원생 때부터 제 몫을 하는 성인이 되어서도 살았으니 참 오래 머물렀던 곳이었다. 빌라가 들어설 예정이라 곧 주택 건물을 통째로 허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래. 그 집에 사는 동안 엄마, 동생 지용이, 나까지 우리 셋이 얼마나 고생했어. 잘된 일이야.‘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집이 사라지기 전에 집 앞에서 내가 나온 기념사진 하나는 남겨두고는 싶었다. 방학마다 마산에 올 때면 반려견 라떼와 나선 산책길에 그 집이 보이지 않는 주변까지만 겨우 갔다. 그 집에 어린 기억 때문에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 터였다. 다음 방학 때 가면 되겠지, 미루고 미루다가 정말 가보려던 차에 결국엔 집 터만 남았다는 이야기를 엄마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없어진다고?’ 건물이 무너진 터에 내가 두고 온 무언가가 파묻혀 있을 것만 같았다. 헛헛하고 허망했다.


그 집은 다세대 주택이었다. 1층에는 주로 단칸방이 있고 대문 옆 계단을 오르면 2층이 양옆으로 나뉘어 한쪽에는 낮은 옥상이 다른 편에는 방 2개와 주방 하나가 있는 좀 더 큰 집이 있었다. 그 집 위, 그러니까 3층에는 옥상이 하나 더 있었다. 아빠가 옥상에 텐트를 쳐놓고 마음껏 술을 마시던 공간이기도 했다. 전에 누가 똥을 정말 똥 모양으로 아주 큼지막하고도 예쁘게 싸놓고 가서 곤란했던 적도 있었다. 내게 그 옥상은 한밤에 밴드 옥상달빛의 ‘옥상달빛’을 듣는 곳이었다. 옥상에 올라가 그 달빛을 보면서 우리 가족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나의 유별난 감수성을 달래곤 했다. 낮은 건물만 있는 동네에서 옥상이 있는 집에 살았기에 언제든 하늘을 누릴 수 있었다. 돗자리 하나만 펴면 피크닉이었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겨우 3층짜리 옥상에 올라가는 일은 그저 낭만적인 일이었기에.


물론 동화 같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세대 주택에 살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를 이웃에게 서로 들키게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떤 일로 어느 집에서 싸움이 있는지, 계속 듣다 보면 심지어 그 싸움의 패턴도 알 수 있었다. 이웃은 술에 잔뜩 취해 난동을 부리는 아빠를 경찰에 신고해 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이웃하지 않은 집에도 몰래 듣고 본 이웃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소문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경찰에 신고할 정도의 일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가정사는 모르는 척하며 살아가는 사이였다. 우리 동네는 싸움이 잦았고 술 취한 어른이 많았으며 아이들과 엄마들이 숨죽여 우는 곳이기에 그랬다. 무언가 깨지고 부서진다고 해서 누가 죽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때마다 알은척 남의 집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 집이 우리에게 특별한 곳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용이와 내가 성장한 만큼 우리가 사는 집의 크기도 커졌다. 다세대 주택 안에서 나름 집을 넓혀 나간 것이다. 대문 앞 단칸방에서 1층 구석의 두 칸짜리 방으로, 시간이 흘러서는 집주인이 살던 2층 집에 살게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얼마나 감격했던가. 오래된 집이기에 마룻바닥의 나무가 다 벗겨졌음에도 산이 보이는 마루에 앉아 창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며 고기를 구워 먹던 날도 있었고. 세면대도 없던 집이지만 특대자 빨간 고무대야에 온수를 잔뜩 받아 그 속에 누워 잠이 들면 어느새 엄마가 때를 슬슬 밀어주던 어린 시절도 거기에 있으니. 나는 그 집에 대한 미운 마음으로 건네지 못했던 작별인사를 이제야 이 글로 늦게나마 보내보는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 가족을 품어주어 고마웠다고. 월세도 내지 못해 발을 동동거릴 때에도 우리를 쫓아내지 않아 주어 덕분에 따뜻했다고.(물론 웃풍이 너무 심하긴 했다야.)


매거진의 이전글 방학 숙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