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되고 나서 가장 진땀이 났던 순간은 동료 교사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였다. 동료 교사라고 하더라도 20대에서 60대를 아우르는 연령층이기에, 내 마음이 동하는 유라기보다는 예전에 방영되었던 TV 프로그램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가까운 질문들이 대부분이었다.
(*첫 근무 지역이 대구였기 때문에 아래 질문들은 대구 사투리로 읽어야 한다.)
Q1. “아버지는 뭐하시고? 어머니는? 교사신가?”
Q2. “애인은 있고?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라고. 애는 하나만 낳을 거제?”
Q3. “그래서 집에 돈은 좀 있고? 교사 월급 가지고 살림 꾸리기 힘들 건데.” ……
하나같이 피하고 싶은 질문들이었다. “아버지는 무직에 현재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서 요양 중입니다. 어머님은 남의 가게에서 근속 판매원이십니다.”, “애인은 아니고 곧 헤어질 것 같은 남자 친구는 있습니다.”, “가난한 편이지만, 잘 아껴 살아보겠습니다.”와 같은 대답을 했다간 교사실 분위기가 싸늘해질 거였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서 이내 심각해져 버린 나는 코 평수가 넓어지곤 했다. 신규 호구 조사에 1+1으로 따라오는 사은품이었을 내 진지한 표정에 쌤들은 최불암 할아버지처럼 “파- “하고 참지 못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그렇게 육아 및 ‘남’의 편인 남편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스승의 날에 편지를 받지 못해 속상해하는 신규 쌤을 보며 놀리다 “파- “하고 웃는 내 모습에 문득 그들이 떠올라 갑자기 입을 막을 때도 있다. 그렇다. 나도 이제 선배다. 각성해야지.)
그렇게 임용고사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압박면접을 매일 마주하느라 약간의 경사가 있는 출근길이 히말라야 등반 같았다. 마음속 산줄기를 오르며 혼자 <인생극장>을 찍었다. 예상 질문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거다. “그건 사생활이라 대답해드리기 어렵습니다.”와 같은 쿨내 나는 답을 했다간 버릇없는 신규라고 미움을 받을 것 같고. “흘러~흘러~ 지금처럼 살고 있네요. 제 사주에 물이 많아서인지. 하핫.” 같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당최 스물넷이 구현해낼 수 있는 재치가 아니었기에. ‘그래 결심했어!’는 무슨. 나는 그냥 인간 얼음이 되곤 했다. “농담이야, 농담. 신규쌤 귀엽네. 호호호.”와 같은 선배 쌤의 얼음땡 신호를 기다리면서.
솔직해지는 것이 어려웠다.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거짓말을 하자니 그건 찝찝하고,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니 어디까지 솔직해야 다른 사람들도 이해해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완전히 솔직해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만큼이나 가족을 초라하게 느끼는 사람의 솔직한 이야기를 직접 마주한 적도 없었고.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좌절감, 분노, 우울, 절망, 슬픔 같은 마음을 쉽게 드러낼 수 없었다. 내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본 적이 없을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나는 긴 글 쓰기를 미루었다. 학교 글짓기 대회를 나가더라도 때, 장소,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들어가야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산문보다는 적절한 생략, 은유, 함축이 허용되는 운문을 썼다. 대학교에 가면서부터 기타를 치며 내 마음 같은 플랫의 코드를 잡고 천천히 마음결을 쓸었다. 내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몰래 보고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글귀에 상처 받은 엄마의 영향이었는지 일기장에도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쓸 수 없었다. 대신 노래를 만들었다. 나만, 그리고 나와 같은 마음인 사람들만 알 수 있을 암호 같은 가사와 코드를 넣어 노래를 부르러 다녔다. 그러다 마음이 동하면 공연장에서 이 노래를 만들게 된 계기를 말했다. 말은 공중에서 흩어지니까 좋았다. 우리 가족에게 가닿을 걱정이 없었다. 시를 쓰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공연장에서의 담소를 통해 나는 에둘러 말하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꽤나 만족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챌 만큼만 솔직해지고, 동시에 내가 괜찮을 만큼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이 세상에 여럿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러다 반환점을 맞았다. 에세이 쓰기 모임에 덜컥 신청을 해버린 거다. 첫 시즌은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였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기억 속 무덤에 묻어버려서인지 글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글감은 내 무덤 속에 있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그 시절에 자랐던 동생에게 물어봤다. 자기 옆을 언제나 지켜준 언니(나) 덕분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게 내겐 큰 충격이었다. 내가 동생의 보호자였구나. 나는 누가 보호해줬을까. 괜찮냐고, 커서 무얼 하고 싶냐고, 친구랑은 잘 지내냐고, 요즘은 어떤 것에 관심이 가냐고, 물어주는 보호자가 내겐 없었다. 어쩌면 난 우리 가족 모두의 보호자가 아니었을까. 아빠의 여린 마음을 걱정하고, 엄마의 외로웠던 어린 시절을 위로하고, 동생의 끼니와 학교생활을 챙기고. 언제나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느라 그 시절의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지난 시즌엔 글을 하나도 쓸 수 없었다. 에둘러 쓰기에는 어린 시절의 내게 너무나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린 나를 위로해줄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 그때의 나만큼이나 어린 우리 반 아이들을 잘 돌보는 것. 그런 것들이었다.
그렇게 글쓰기 숙제를 하나도 제출하지 않은 부진 학생이 글쓰기 모임을 다시 신청했다. 이번 시즌엔 네 편의 글을 모두 썼다. 그 글을 쓰면서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그때의 ‘내’가 부끄러워서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 적당히 솔직해지고, 내가 괜찮을 만큼만 드러내고 에둘러 살아왔는데, 글쓰기에서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나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만약 그 아이가 우리 반에 있었다면 나는 그 아이를 꼭 안아줬을 텐데. 그 시절에 들어야만 할 칭찬들을 매일매일 잔뜩 말해줄 텐데. ‘더 솔직해질게. 부끄러워하지 않을게. 자랑스러워할게. 너도 이제 철없이 해맑게 “파- “ 하고 웃어봐.’ 같은 사과를 전하기 위해. 적당히 솔직하지만은 않은 긴 글들을 꾹꾹 눌러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