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1.5L 델몬트 오렌지주스 유리병 사건”을 다룸.
“별일 아닐 거야. 걱정하지 마.”
이런 대사가 나오는 장면 뒤에는 항상 별일이 생긴다. 그리고 그 말을 타인에게서 듣는 것이 아니라 울먹이며 스스로에게 건네고 있었다면, 결국 극의 후반부엔 처량한 표정을 한 사람으로 화면이 가득 차기 마련이다. 절대 아닐 거라며 고개를 휘젓게 되는 건, 자신의 근처에 도사리는 별일을 감지했다고 강하게 끄덕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 말도 못 하고 끙끙 속을 앓는 이에게, 그 거짓말은, 그 혼잣말은, 분명 한 시절을 모면하게 해 준다. 어찌어찌 지나가게 해 준다. 무사 틀림없다. 내가 그랬으니까.
어릴 땐 거짓말을 이처럼 효험있게 쓰지 못했다. 거짓말은 무조건 나쁜 것인 줄로만 알았다. 엄청난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거짓말을 떠올리게 될 때도 있었지만, 거짓말은 그냥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니 거짓말이 더 세지기 전에 얼른 참말을 뱉었다. 또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무마시켰다. 만 다섯 살쯤 때의 “델몬트 오렌지주스 사건” 때에도 그랬다. 요즘엔 나오지 않는 1.5L짜리 델몬트 유리병에 500원 동전이 빠지면서 생긴 일이었다. 엄마, 아빠는 일을 가시고 집 안에는 아이 둘만 있었다.(쓰다 보니 무슨 경찰서 조서 같다.) 당시 새콤달콤이 50원 정도였고, 더블비얀코가 200원 정도였을 거다. 고로 미취학아동 둘에게 500원 동전이 갖는 의미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놀이터의 모래를 아무리 깊이 파낸다고 해도 큰 동전을 줍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 큰돈을 잃을 위기를 두 어린이는 어떻게 해결했는가, 하면.
여기에서 잠시. 앞으로 이어질 두 어린이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교사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깨알 지식을 슬며시 꺼내보겠다.(이것 참 쑥스럽다.) 스위스의 발달 심리학자 피아제는 ‘아동 인지발달 이론’에서 만 2~7세를 전조작기로 분류했다. 당시 우리 자매도 여기에 속한다. 이 시기는 언어, 그림, 가상놀이에 관한 상징적 사고는 발달해 있지만, 논리적·가역적 사고와 보존 개념은 아직 미숙한 상태이다. 쉽게 이야기하면(대학원 수업 때 교수님들이 자주 사용하시는 이 표현을 나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렌지주스를 여러 컵에 나눠 부은 후 동전을 꺼낸 뒤, 앞에 했던 행동을 거꾸로(가역적 사고) 하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다(보존)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우리 자매가 아무리 골똘히 생각을 해도 가장 쉬운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음에 과학적 뒷받침이 있다는 바이다. 결국 두 어린이는 우리 집 일짱과의 대면을 앞두고 거짓말과 참말의 기로에 서야 했다.
“\\\\\\\\\\ 두둥 \\\\\\\\\\ “ (넷플릭스 효과음임.)
주스를 하수구에 버린다. 그리고 동전을 꺼낸다. 엄마에겐 주스를 다 마셨다고 거짓말한다.
(걱정되는 점: 그 큰 주스를 다 마시고 어린이들의 배가 홀쭉하면 엄마에게 들킬 것 같다. 우리가 다 마신 척 거짓말을 잘할 수 있을지도 걱정된다.)
다 마신다. 진짜로. 다 마신다. 내가 동생보다 13개월 먼저 태어났으니 좀 더 마시기로 한다.
(걱정되는 점: 주스가 너무 많다.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지도 모른다.)
어린 나는 지금보다 더욱 융통성이 없었다. 으휴. 사실 동전을 빠뜨린 건 나였는데. 우리 동생은 억울하게 내가 시키는 대로 나랑 같이 주스를 꿀꺽꿀꺽 계속 마셔야 했다. 아마도 그날로부터 아주 오래간 우리 둘은 주스를 먹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무척 한심해서였는지, 것도 아니면 그렇게라도 주스를 다 마셔서 결국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강산이 세 번은 변한다는 무려 30년 전의 어린 시절 일인데도, 무척이나 생생하다. 그때를 생각하면 턱끝까지 차오른 주스 신물이 느껴질 정도다.
허나. 내 인생에 산재한 거짓말 후보들이 영영 이런 것들이라면 사는 게 참 재밌겠다.
어떤 거짓말은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