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채비

늙어버린 나를 상상하며

by bookphoto

노안이 찾아와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게 됐다. 돋보기안경으로 흐릿한 문장을 읽으려다 그만 책장을 덮어버렸다. 방금 덮어버린 책들은 내가 집필한 책들. 읽지 않아도 어느 쪽에 오탈자가 있는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장들이 어떤 문장들 틈에 숨어 춤을 추는지 떠올릴 수 있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들을 마음속에서 불러온다. 다행히도 그 문장들은 또렷하게 살아있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인다. 이를 테면 울 엄마가 봄처녀처럼 해사하게 웃는 모습, 막 이별을 하고 온 나의 눈물 냄새를 맡고 와서는 얼굴을 온통 핥아주던 어느 오후의 반려견의 온기, 말다툼 끝에 눈물을 왕- 하고 터뜨린 나를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내 젊은 연인, 엄마의 눈빛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로에게 발길질을 하며 싸우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웃어버리고 말던 사이의 내 동생. 그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나 혼자 여기에 남았나. 내 사랑들은 꿈에만 아주 가끔 스치듯 출연하고.


더 쓰지 않은 것을, 더 말하지 않은 것을, 더 노래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해질 기억이자 외로움일 줄, 그리움일 줄 몰랐다. 이름을 부르면 항상 거기에 있어줄 줄 알았다. 나는 여기에, 너는 거기에.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서로를 마냥 귀찮게만 할 줄 알았다. 그리워하면서도 미워하는 눈빛을 이제는 보낼 곳이 없다. 멀리 있는 게 더 잘 보이게 된 요즘. 외로워질 때마다 하늘을 본다.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동네 어귀를 산책한다. 내 사랑들의 냄새가 날 것 같은 곳으로 서성여보다가, 해가 뉘엿뉘엿 지면 다시 그들을 꿈에서 만날 지도 모르니. 밤 거미도 아직 나오지 않은 초저녁에 집으로 얼른 돌아가 잠자리에 눕는다. 내가 그리워하는 이들이 적혀 있는 책을 초대장처럼 안고. 이 세상에 내가 왔을 때 반겨준 그들처럼 내 꿈속에 찾아와준 그들을 반길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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