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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의 책놀이터 Jan 22. 2016

[에세이] 당신은 흑黑이요, 백白이요?

최인훈, <광장/구운몽>, 문학과지성사, 1996

어제는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습니다. 때마침 개봉한 <오빠생각>이라는 영화가 있어 별 고민 없이 보게 됐습니다. 대략 어떤 영화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보니 훨씬 좋더군요. 시대배경은 영화 <국제시장>의 초반부와 매우 닮았지만, 이후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 방향에서는 조금 다르더군요. <국제시장>을 관람할 때와 <오빠생각>을 관람할 때 모두 관객들의 흐느낌과 훌쩍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신파조의 눈물인가, 아니면 인간 내면의 깊은 슬픔이 빚어낸 눈물인가는 관객마다 다르겠지요. 물론 기자나 평론가 양반들의 평가가 박한 것을 보니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신파조로 보였던 모양입니다만.


간단하게 영화 <오빠생각>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지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 영화를 볼 계획이 있으신 독자들께서는 아니 보시는 것이 좋으시겠습니다) 사실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스토리라인도 간결한 편이라 소개가 큰 폐가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한상렬 소위(임시완 분)는 6.25전쟁의 최전선에서 간신히 살아남고, 운좋게 후방 부산으로 전입을 명받습니다. 거기서 전쟁고아를 수용한 고아원의 관리감독 임무를 맡게 되는데, 우연한 기회에 아이들을 모아 합창단을 조직하게 됩니다. 사실 한 소위는 음대 출신이었지요. 동구(정준원 분)와 순이(이레 분) 남매를 비롯해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수많은 고아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화음은 군인들 조차도 감동시키게 되고 이들은 전방 부대까지 위문공연을 다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간단하지요.


여러 장면들이 기억이 나지만 동구와 순이 남매가 아버지를 잃게 되는 장면이 계속 생각이 납니다. 동구와 순이는 비록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극심한 이념대립과 그로 인한 6.25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빨갱이로 몰려 몰매를 맞고 죽는 것이지요. 동구아버지가 진짜 좌익정치범이었다면 그나마 이해하겠지만 동구아버지는 그런 것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인민군 치하에서 자신과 가족들이 살기 위해 우익인사를 고발했고 그들이 피해를 입게 된 연유로 이제 국군 치하에서는 빨갱이가 된 것입니다. 한 때는 같이 막걸리 마시고 두레로 일손 주고 받던 한동네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를 고발하고 죽이게 된 시대의 아픔이었지요.


이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은 것은 최근 읽었던 김동춘 교수의 <대한민국은 왜?>의 한대목 때문이었습니다. 6.25 당시 좌익과 우익이 번갈아가며 서로를 학살한 '신천 학살' 사건 이야기지요.


1950년 10월 13일 인민군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신천·재령·안악 지역의 우익인사를 살상했다. 특히 재령에서는 우익이 봉기를 일으키자 후퇴하던 인민군이 봉기를 진압하고 우익 대원과 기독교인 등 이른바 '반동분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1950년 10월 중순 이후 인민군은 후퇴했으나 유엔군이나 국군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던 치안 공백 상태에서 우익 기독교 청년들이 1946년 이후 그들을 탄압했던 지역의 좌익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보복 학살했다.
- 김동춘, <대한민국은 왜?>, 사계절출판사, 2015, 209~210pp.

그 시절의 모습입니다. 생존을 위해 좌도 우도 될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증오에 쓰러져 갔습니다. 영화 <오빠생각>에서 좌익에게 모든 가족이 몰살당한 춘식이(탕준상 분)는 시종일관 동구에게 "저놈 빨갱이다"며 소리를 지르고 동구는 매번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고 맞받아칩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생존논리였지요. 전쟁의 광기가 모든 이들을 언제라도 학살의 비극으로 내몰 수 있던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너는 흑黑이냐, 백白이냐?"는 질문 하나로 인간의 인권과 생명을 가볍게 유린하던 그 시대를 살던 한 청년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명준이라고 합니다. 그는 좌익에 속한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형사에게 모진 고문을 당합니다. 그 장면을 조금 옮겨보지요.


명준은 아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나자빠지다가, 의자에 걸려 모로 뒹군다. 끈적끈적한 코밑에 손을 댄다. 마구 코피가 흐른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한 손을 코에 댄 꼴이 흡사 개 같다 싶어, 엉뚱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쿡 웃는다. 그러자 여태까지 무서움이 씻은 듯 가신다.
"어? 이 새끼 봐, 웃어? 오냐 네 새끼레 그런 줄 알았다. 이 빨갱이 새끼야!"
이번에는 발길이 들어왔다. 간신히 피한 발길이 어깨에 부숴지게 울린다.

....

"엄살 부리지 말고 인나라우. 너 따위 빨갱이 새끼 한 마리쯤 귀신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 있어. 너 어디 맛 좀 보라우."
- 최인훈, <광장/구운몽>, 문학과지성사, 1996, 65~66pp.

"빨갱이냐 아니냐?"를 집요하게 캐묻고 대답을 강요하는 남한 사회의 광장은 명준에게 텅빈 광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밀실에서 개인의 욕망과 쾌락을 찾아 몰입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더이상 자신의 광장이 아님을 깨달은 명준은 밀항선을 타고 북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곳의 광장 역시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찬 회색광장임을 금새 깨닫습니다. 관제언론은 명준에게 허위로 자신들의 체제선전을 강요합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영혼이 없이 껍데기만 남아있었습니다.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이 만주의 저녁 노을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팔자를 고치는 들뜸 속에 살고 있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코뮤니스트들이 들뜨거나 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일이었다. 그가 처음 이 고장 됨됨이를 똑똑히 느끼기는, 넘어와서 바로 북조선 굵직한 도시를, 당이 시켜서 강연걸음을 했을 때였다. 학교, 공장, 시민회관, 그 자리를 채운 맥빠진 얼굴들. 그저 앉아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 울림도 없었다. 혁명의 공화국에 사는 열기 띤 시민의 얼굴이 아니었다.
- 최인훈, <광장/구운몽>, 문학과지성사, 1996, 111~112pp.

명준에게는 남과 북 어디에도 인간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진실한' 광장이 없었습니다. 그저 "너는 흑이냐 백이냐?"는 질문과 그에 따른 '복종'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배운 인텔리인 명준이 고민한 것과는 다르게,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자들까지 흑이냐 백이냐는 일방적인 질문 앞에 섰을 때 이것은 슬픈 희극이 됩니다. 이데올로기나 혁명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식구와 내가 살아남을 수만 있기를 바랬던 이들에게 전쟁은 무척이나 잔인한 현실이었겠지요. 북에 살았던 조선사람이던, 남에 살았던 조선사람이던 말입니다.


오늘의 현실은 또 어떻습니까. 얼마 전 타계한 신영복 교수 같은 경우에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빨갱이 간첩으로 몰려 20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지요. 동양인에게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피부암으로 타계한 선생의 삶에서 기나긴 수감생활의 고초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해방이 되고 전쟁이 끝난 오늘에 와서도 "흑이냐 백이냐"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것은 흑과 백이 무엇인지 모르는 평범한 사람에게도 칼날을 들이대며 대답을 강요합니다. '종북'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말이 정치권을 넘어 일상을 지배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을 비추는 단편적인 사례지요.


<오빠생각>에서 좌익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춘식이와 우익에 의해 아버지가 몰매맞아 죽은 동구가 서로를 향한 증오로 합창단의 하모니를 망치자 지휘자인 한 소위는 둘을 앞으로 불러냅니다. 그리고 둘에게 원하면 얼마든지 상대를 치고 싸우라 말합니다. 하지만 둘은 싸우지 못하지요. 상태를 때리지 못합니다. 그러자 한 소위는 두 아이에게 각각 대니보이와 애니로리라는 노래를 부르라 합니다. 둘 중 가사나 음정이 틀린 사람이 지는 것이라면서요. 서로 지기 싫은 두 아이는 열심히 자신의 노래를 부릅니다. 두 노래는 전혀 다른 노래지만 놀랍게도 아름다운 화음이 되어 울려퍼집니다. 한 소위는 "이처럼 서로 다른 것이 어우려져 완성되는 것이 화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화해와 용서라는 말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 정신교육 때 듣던 '굳건한 안보의식과 이념무장' 같이 증오와 분노의 말에 익숙하지요. 증오와 분노의 언어들은 필연코 누구에게나 "당신은 흑黑이요, 백白이요?"는 질문을 하고 대답을 기다립니다. 이미 이런 질문 앞에서 부모를 잃고 형제와 친구를 잃었던 세대가 자연적으로 거의 사라져가는 지금에도 흑과 백의 이분법 앞에서 대답을 강요하는 메커니즘은 문화적 DNA를 타고 유전된 것입니다. 조화로움과 평화는 요원하고, 대치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은 그들의 체제에 의해 더욱 멀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동구와 순이, 춘식이가 흘리던 눈물은 아직도 멈출 줄을 모릅니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아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

"중립국이라지만 막연한 얘기요. .... 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것입니다. 인간은...."
"중립국."
"허허허,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 나라 내 민족의 한 사람이, 타향 만리 이국 땅에 가겠다고 나서니, 동족으로서 어찌 한마디 참도되는 이야길 안 할 수 있겠습니까? ...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서,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라는...."
"중립국."
"당신은 고등 교육까지 받은 지식인입니다. 조국은 지금 당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버리고 떠나버리렵니까?"
"중립국."
- 최인훈, <광장/구운몽>, 문학과지성사, 1996, 170~172pp.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의 뒤에도 이 질문을 또 받은 명준은 "중립국"을 외칩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너는 흑이냐 백이냐. 명준처럼 "중립국."을 외치시련지요? 그럼 그런 중립국은 있기는 한 곳일까요. 우리에게 흑과 백의 가운데 어디쯤 회색빛 중립국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명준은 중립국을 말했지만 그가 향한 곳은 타고르호 위에서 바라본 어두운 남중국해의 어디쯤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아름다운 화음을 이뤄내는 중립국은 정녕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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