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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의 책놀이터 Feb 24. 2016

[에세이]필리버스터를 하는 이유

- 한홍구, 대한민국史, 2005/신경민, 국정원을 말한다, 2013

‘필리버스터’가 화제입니다. 필리버스터는 ‘의회 안에서의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이뤄지는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행위’를 말합니다. 현재 야당은 무제한토론 릴레이로서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일명 ‘테러방지법’안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장시간 발언으로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이 상황이 왜 벌어졌을까요?


먼저 문제가 되고 있는 ‘테러방지법’이 무엇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통해 2.23에 새누리당 주호영 의원을 대표발의자로 새누리당 156명이 동의한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에 대한 수정안’을 찾아봅니다. 1조는 이 법의 의의, 2조는 테러의 정의, 3조는 국가와 지자체의 역할 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쭉 내려가다보면 9조가 있는데 여기에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9조(테러위험인물에 대한 정보수집 등)

① 국가정보원장은 테러위험인물에 대하여 출입국·금융거래 및 통신이용 등 관련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이 경우 출입국·금융거래 및 통신이용 등 관련 정보의 수집에 있어서는 「출입국관리법」,「관세법」,「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통신비밀보호법」의 절차에 따른다.

② 국가정보원장은 제1항의 규정에 따른 정보 수집 및 분석의 결과 테러에 이용되었거나 이용될 가능성이 있는 금융거래에 대해 지급정지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금융위원회 위원장에게 요청할 수 있다.

③ 국가정보원장은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개인정보(「개인정보 보호법」상 ‘민감정보’를 포함한다)와 위치정보를 「개인정보 보호법」 제2조의 ‘개인정보처리자’와 「위치정보의 보호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 ‘위치정보사업자’에게 요구할 수 있다.

④ 국가정보원장은 대테러활동에 필요한 정보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대테러조사 및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추적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전 또는 사후에 대책위원회 위원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시면 뜬금없이 국정원장이 등장합니다. 앞의 6조에서는 ‘대테러센터’의 설립을 규정하고 있는데 정보관련분야는 국정원이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국정원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이미 지난 대선 당시 댓글을 통해 선거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나 곤욕을 치렀던 그 국정원 아닙니까. 테러방지법의 9조는 그 국정원에 개인의 출입국 기록부터 금융거래정보, 통신이용정보, 위치정보 등을 합법적으로 수집하고 요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겠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물론 테러용의점이 있는 자에 대한 사전적 대비라는 부분에서 법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의미가 무색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정원의 탄생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전통을 보자면 과연 국정원에게 맡기고 그렇게 끝날 문제인지는 재고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수시로 국내정치에 개입하고 불법적인 사찰과 감청활동을 일상적으로 저지르면서도 견제받지 않는 이 거대한 권력기관에 무엇을 믿고 생선을 덥썩 맡길 수 있느냐는 것이 야당의 입장입니다.


국정원의 전신은 국가안전기획부, 즉 안기부였지요. 안기부 이전에는 중앙정보부, 일명 KCIA로 불리는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이었지요. ‘남산 밑으로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간다’는 소문의 당사자였습니다. 


5·16 군사반란의 주역은 정보장교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반란에 성공한 뒤 제일 먼저 한 짓은 중앙정보부라는 거대한 정보기관을 만드는 일이었다. 반란범들이 헌법을 짓밟고 최초로 만든 ‘법’은 반란에 가담한 군인들로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대한민국의 최고 통치기관이 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었다. 이 법이 공포된 것은 1961년 6월 6일이고, 그로부터 4일 뒤인 6월 10일 ‘중앙정보부법’이 ‘국가재건최고회의법’과 함께 공포되었다.
한홍구, 「대한민국史 03」, 한겨레출판, 2005, 89p.


보통의 해외정보기관처럼 대외정보활동이나 공작활동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권력기반과 정통성이 취약했던 군부정권의 정권안보용 기관으로 설립됐던 것이 중앙정보부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북용의점 파악이나 수사, 정보수집 등에 힘을 쏟기보다는 국내정치에 개입하고 주요인물을 사찰하는 등의 활동에 주안점을 두게 됐지요. 그들의 주요 작품이 인민혁명당 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 동백림사건, 김대중납치사건, 김형욱 실종사건 같은 것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정보기관의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로는 정보기관들이 국내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해외나 이북 정보에 어두웠던 점을 들 수 있다. 박정희 시대의 중앙정보부는 박정희가 신경 쓸 만한 정치인 개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데 인력과 장비와 예산을 쏟아부었다. 1960년대 말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을 지낸 그레그는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해외나 북한 정보에는 관심이 없고 국내 정치에만 매달린다고 불평했다.
한홍구, 「대한민국史 03」, 한겨레출판, 2005, 95p.


중앙정보부 시절은 물론 이후 안기부, 국정원으로 간판을 갈아달면서도 이런 전통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미 지난 대선 당시 선거에 개입한 정황이 다수 드러나서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았습니까.


(2013년) 3월 18일 국정원이 ‘대북 심리전의 일환’이라고 주장해온 인터넷 댓글 공작은 원세훈 국정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폭로가 나왔다. 국정원은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이라는 제목의 내부자료에서 ▲선거에서 인터넷 여론에 개입 ▲국정원 직원 김씨가 소속된 심리전단의 젊은 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 ▲종교단체의 정부 비판활동 자제 ▲4대강 사업 등 국책사업에 대한 대국민 여론전 등을 지시하거나 주문했다. 이는 원세훈 원장이 직접 국내정치에 개입을 지시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신경민, 「국정원을 말한다」, 비타베아타, 2013, 77~78pp.


현대에 와서도 국정원은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라는 있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현대판 간첩조작사건인 유우성 씨 사건 같은 고전적인 공작을 다시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국정원 뿐이 아닙니다. 어떤 기관이던 간에 개인정보에 대한 사찰이 가능케 한다면 결과는 비슷할 것입니다. 국정원이 아니라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이 민간인을 사찰한 김종익 씨 사건 등의 범죄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테러방지법’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정보들에 대한 무차별적 접근을 허용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아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본래의 목적을 넘어 악용되거나 오용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검경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검찰과 경찰은 대표적 공익 수사기관이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에 대한 검경의 수사는 국정원장의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검찰의 국정원 압수수색 역시 국정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예산 집행과 결산의 특혜
일반적으로 국가기관은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할 때 세출예산의 사항별 설명서와 예산요구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또 감사원의 회계감사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정원은 사항별 예산이 아닌 총액만 제출하면 되고 첨부서류 역시 면제된다.

·국회 정보위의 국정원 통제 한계
국정원 담당 국회 상임위는 정보위원회다. 하지만 정보위에 상정되는 법안의 대다수는 국정원에 대한 감시와 통제강화와 거리가 멀다. 또 예산·결산에 대한 심의 및 승인 역시 일체의 부속서류 없이 총액으로 제출되고 국정원이 요청한 대로 무수정 통과가 대부분이다.
신경민, 「국정원을 말한다」, 비타베아타, 2013, 276~277pp.


이미 거대한 조직과 예산을 확보한 채 견제 받지 않고 굴러가는 국정원이라는 비밀스런 기관이 테러범을 사전파악 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정보에 대한 무제한적인 접근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을 때 벌어질 사태를 상상해 보셨습니까? 바로 지금 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있는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은 그런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테러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그 취지에는 적극 동감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현재의 법안은 큰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수정보완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계속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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