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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리남 Mar 25. 2022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https://youtu.be/r4YlqaxdDKc

*아래 글은 영상의 스크립트 입니다.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저자로 잘 알려진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하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이 이런 문제를 제기한 것은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에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질문을 던졌던 당시는 1960년대, 미국 대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시대가 본격화 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기에 에리히 프롬의 질문은 당시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전쟁과 폭력, 갈등에 대한 일침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의 글은 냉전시대가 본격화 되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2022년 오늘 날에도 에리히 프롬의 질문은 우리에게 울림을 줍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제3차 세계대전이 언급되는 현 시점, 비인간적인 사건 사고가 난무하는 시대에 우리는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진은 우크라이나의 도시와 군인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시민의 모습



1. 삶이란 무엇인가?


먼저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은 쉽게 말하면 죽음의 반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은 단순하게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하기에는 삶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보입니다.


삶은 특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특수성이란 삶이라는 것은 항상 하나가 되고 완전해지려는 성향입니다. 그렇기에 삶은 늘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며, 성장과 변화가 멈추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삶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앞서 말했듯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며,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구조가 서로 주고받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구조를 살펴보면 삶은 예측 가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예측은 불가능 합니다. 사과나무와 벚나무가 있으면 사과나무는 사과나무로, 벚나무는 벚나무로 자라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과나무가 몇 개의 과실을 맺을지, 벚나무의 벚꽃잎이 얼마나 필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벚나무에서는 벚꽃을, 사과나무에서는 사과가 열릴 것을 기대할 수는 있지만 또 얼마나 꽃이 피고 과실이 맺힐지는 알 수 가 없다.

하나의 생명, 또 우리 인간의 삶이 자라나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지는 놀라울 만큼 무질서합니다. 삶은 늘 놀라운 일들로 가득합니다. 개인의 의지와 노력, 또 환경과 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우리의 삶을 변화가 가득한 길로 인도합니다. 그렇기에 생명체는 예상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예상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갖는 큰 역설입니다.



2. 삶을 다루는 자세 – 통제와 폭력


이렇게 변화무쌍한 삶을 지배, 통제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국 불행해질 것입니다. 삶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손아귀에 쥐려할수록 더 변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과 생각, 행동을 통제하겠다고 고집을 피워보지만 오히려 이러한 행동은 삶에서 해방감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강박적인 통제 욕구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파괴해갑니다.


모든 종류의 사랑에는 한 가지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를 향한 나의 사랑이 적절하고 상대방의 욕망과 본성에 맞을 때만 나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통제하려는 사람은 이러한 상대방의 욕구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상대를 통제하려합니다.


그들은 상대를 많이, 심지어 열정적으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왜 사랑을 얻지 못하는지, 심지어 상대방이 자신을 쫓아내기까지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랑이 상대방의 욕구와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고, 아니면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제멋대로 정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욕구에 맞게 해야 한다....


통제와 폭력행사는 불과 한 걸음 차이입니다. 삶의 통제에 해당하는 사항은 폭력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랑과 폭력은 절대 화합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 중 사랑과 폭력만큼 거리가 먼 것은 또 없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과 폭력은 절대 화합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 아래에 알게모르게 휘두르는 폭력들을 얼마나 많이 볼 수 있는가?


폭력은 단순히 신체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심리적인 방식도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된 아들이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갖겠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폭력입니다. 아들은 자신이 택한 여자와 결혼하겠다는데 부모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폭력 행사는 인간존재의 문제를 푸는 길 중 한 가지입니다. 하지만 힘을 갖춘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폭력 행사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긴 하지만 만족을 주는 길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신이 그 폭력행사의 수단에 종속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폭력은 방어 수단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래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죽음과 파괴를 거리낌 없이 수용합니다. 하지만 폭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방법입니다. 이는 히틀러와 같은 인물을 보더라도 늘 역사적으로 증명되어 왔습니다.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폭력의 수단을 자기 인성의 크기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기 자신, 자기의 본질을 키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폭력의 수단을 키우는데 모든 에너지를 투자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커지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더욱 더 약해지기만 합니다.


우리는 상대를 대할 때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몸이 얼마나 긴장하는지, 또 얼마나 곧장 폭력의 수단을 기웃거리는지, 폭력의 수단을 찾을 수 없거나 갖고 있지 않으면 얼마나 절망하는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흥분하면, 생각 없이 폭력의 수단을 찾고 행하는 사람이라면, 그 즉각적인 자신의 반응에 자세히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 더 나은 방도를 고민하려 노력하며, 폭력의 마음가짐을 버리고 활력과 인내심을 발휘하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득이 될까 고민하지 말고 과정 자체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삶은 본질적으로 성장의 과정이며 온전해지는 과정이므로 통제와 폭력의 수단으로는 사랑할 수 없으며, 삶에 대한 사랑은 사랑의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랑의 핵심입니다. 사랑은 한 명의 사람, 한 마리의 동물, 한 포기의 식물에 담긴 생명을 향합니다.


근데 왜 에리히 프롬은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가”가 아닌 중간에 “여전히”라는 말을 붙였을까요? 여전히는 “전과 같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어입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면 “우리는 전과 같이 삶을 사랑하는가?” 혹은 “우리는 계속해서, 꾸준히 삶을 사랑하는가?”가 됩니다.


왜 에리히 프롬은 삶과 사랑 사이에 “여전히” 라는 말이 들어와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을 꾸준히 못하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 과정보다 결과를 더 중요시하는 문화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이 문화란 사물을 생명보다 중요시하고 수단을 목적으로 삼고, 심장이 필요할 때 이성을 사용하라고 하는 문화입니다.


두 번째는 날로 커지며 절대 채워지지 않을 사물에 대한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사물은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사물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 자체를 추구한다면 그 사물은 인간의 관심과 사랑을 부수고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 즉 사물로 만들려는 성향을 띄게 됩니다.


인간이 만든 물건으로 가득한 세상은 우리의 큰 자부심이면서 동시에 위기입니다. 현실에서 사물적인 측면이 앞설수록 이 사물의 사용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속성을 덜 경험할수록 삶을 사랑하는 능력도 줄어듭니다.


셋 째, 행동의 관료화가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팀워크’니 ‘집단정신’이니 하는 듣기 좋은 명칭을 아무리 가져다 붙여도 최대의 경제성을 목표로 개인을 재단해 적절한 집단 구성원 형식에 맞추려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개인은 능력 있고 규율을 잘 지키지만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며 온전히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기에 삶을 사랑하는 그의 능력은 마비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을 다시 사랑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대량생산 시스템과 기술성과를 포기해야 할까요? 에리히 프롬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기술발전이 주는 위험을 깨달아야 하며 물질적인 것들을 있어야 할 자리에 되돌려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사물로 바꾸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사물의 주인으로만 존재해야 할 것이라고 말이죠. 살아 있는 것을 조종하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비법은 없지만 많이 배울 수는 있습니다. 망상을 버리고 타인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 계속 밖으로만 나다니지 말고 자신에게 가는 길을 배울 수 있는 사람, 생명과 사물의 차이를, 행복과 흥분의 차이를, 수단과 목적의 차이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폭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삶에 대한 사랑을 향해 이미 첫걸음을 뗀 셈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 내면에 선천적으로 삶을 사랑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첫걸음을 뗀 후엔 다시금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 질문에 맞는 의미 있는 해답을 이런 저런 책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답은 자기 안에 있을 것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사회의 빠른 발전 속도에 따른 우리 인간의 종속감, 무력감, 상실감이 발생한 이유는 우리 내면의 삶을 사랑하는 힘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며, 삶을 사랑하고 창조적인 활동을 이어가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의 첫 번째 글인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대한 간략한 내용정리였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라이너 풍크 박사가 책을 엮었습니다. 국제 에리히 프롬 협회 이사인 라이너 풍크는 에리히 프롬의 생애 마지막 조교였으며, 에리히 프롬에 대한 연구의 권위자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있는 지금, 나 자신의 내면을 키워나가며 삶을 사랑할 자유를 얻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심은 어떨까요?


이만 리뷰를 마치며, 시간이 허락되신다면 밑에 영상으로 시청해주시고 좋아요와 구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에게 큰 힘이 되며 주신 힘으로 더 좋은 책 소개하고 리뷰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책을 리뷰하는 남자 책리남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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