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가 쌓이다.
가을바람이 부는 저녁,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된장찌개 냄새였다. 엄마 냄새다. 어릴 적, 우리 집 저녁 식탁에서는 늘 된장찌개 냄새가 풍겼다. 엄마의 된장찌개는 특별했다. 엄마가 직접 담근 된장, 잘게 썬 소고기와 부드러운 두부가 듬뿍 들어간 국물은 진하고 구수했다. 한 숟갈 떠 입에 넣으면 깊은 감칠맛이 퍼지고, 따뜻한 온기가 속을 채웠다. 거기에 무와 양파를 채 썰어 고추장과 매실액으로 버무린 엄마의 비법 무생채까지 더해지면 밥 한 그릇이 뚝딱 비워졌다. 매일 비슷한 반찬이었지만, 그 밥상이 그립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에 참기름과 간장에 살짝 찍어 먹는 김, 시원한 물김치 국물까지. 밥상 위 모든 것이 따뜻하고 익숙한 위로였다. 엄마가 차려준 식사가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시간이 흘러 취직을 하고 바쁘게 살아갔다. 끼니는 대충 때웠고, 인스턴트 음식이 익숙해졌다. 배는 채워졌지만, 늘 피곤하고 지쳤다. 그러다 어느 날, 오랜만에 집에 들러 엄마가 차려준 밥 한 그릇을 먹으려 첫 숟가락을 뜨는 순간, '아, 이 맛이지!' 힘이 났다.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의 밥상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고, 다시 부딪혀 볼 수 있는 용기였다. 어느새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매일 밥상을 차리던 엄마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마치기까지. 정작 밥을 먹는 시간은 찰나였지만, 그 시간을 위해 하루를 보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반복의 시간들이 얼마나 수고스러웠을까? 그런 엄마의 수고가 때로는 헛수고처럼 보였다. 사실 그것은 가족을 위해 매일의 기도였다. 나 역시, 그 밥상에서 힘을 얻고 나의 가족을 보살피고 있다.
엄마의 된장찌개, 무생채, 따뜻한 잡곡 밥 위에 얹어진 작은 반찬들. 사랑이었고, 위로였으며, 살아갈 힘이었다. 이제는 내가 그 밥상을 가족을 위해 차릴 차례다. 한동안 밥심을 무시하고 요리를 게을리했다. 워킹맘이라는 핑계로 바쁘다는 이유로, 끼니를 간편하게 해결했다. 외식과 즉석식품이 일상이 되었고, 그게 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자꾸 아프기 시작했다. 피곤이 가시지 않고, 힘이 나지 않았다.
"왜 나는 맨날 피곤할까?" 이유가 궁금해 건강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알게 되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우리 몸이 된다는 것을.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과 에너지를 채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갔다. 아이들도 자주 감기에 걸리고, 병원을 들락날락했다. 이유를 찾다가 결국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났다. 엄마의 된장찌개, 엄마가 손수 버무린 무생채, 엄마가 매일 차려준 따뜻한 밥상. 그제야 보였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상처받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 힘든 날. 그런 날, 마음을 채우는 음식이 생각난다. 엄마는 단순히 우리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를 채워 주는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는 것을 엄마가 된 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릇과 양념통을 정리해 보았다. 요리는 여전히 서툴렀고, 바쁜 생활 속 에서 끼니를 완벽히 챙기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시작했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엄마가 해 주던 맛을 떠올리며 무생채를 만들었다. 잡곡밥을 올려둔 압력솥이 ‘치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동안 아이들이 배고프다며 주방을 기웃거렸다. 따뜻했다. 밥 짓는 소리도, 나무 도마 위에서 채소를 다듬는 소리도, 구수한 밥 냄새도. 아이들도 이 이 모든 것을 추억했으면 좋겠다.
간을 보라며 한 숟가락 떠 아이 입에 넣어주면, 아무 말 없이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그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맛있지?”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진짜 엄마의 마음을 이해했다. 엄마가 매일같이 차렸던 밥상이 우리를 지켜주었듯, 나도 내 가족에게 그런 밥상을 차린다. 엄마의 기도가 담기 밥심이 보약이 되었다. 헛수고 같던 날이 쌓여 힘든 순간을 마주할 때, 밥상에서 얻은 힘으로 툴툴 털고 일어설 수 있기를 상상하며 한끼를 차린다.
"애들아 밥 먹어,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어!"
바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식탁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갔다. 누군가의 정성으로 차려진 밥을 당연하게 여기고, 때로는 귀찮다는 이유로 건너뛰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밥 한 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정성이 담겨 있다. 따뜻한 국 한 그릇, 정성껏 지은 밥 한 숟갈이 하루를 버티는 든든한 에너지가 된다는 걸, 건강을 잃어 본 후에야 알았다. 정직한 밥 한 그릇에 담긴 따뜻한 힘을 믿는다. 밥상 앞에서 마주 앉아 함께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