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멘탈이 체력에게 멈추라 한다.

'트라우마'라는 단어에 숨다

by 선형

나는 배를 타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 위에 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이 감정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어느 날 사건으로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오래된 공포다. 그 두려움은 내 안에서 자라났다. 누가 뭐라 해도 그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뒀다.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2012년 여름, 둘째 돌잔치를 두 달 앞두고 가족들과 남해로 여행을 떠났다. 그날은 하늘도 맑고 바다도 푸르렀다. 친구 가족들과 함께 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나는 첫째 아이의 손을 잡고, 남편은 둘째를 안고 있었다. 외도로 들어가는 통통배는 50명이 채 탈 수 없는 작은 어선에 의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배에 오르며 긴장은 됐지만, 이렇게까지 기억에 남을 하루가 될 줄은 몰랐다.


태풍이 남해를 비켜서 일본으로 방향을 튼 뒤였다. 넓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지만, 깊은 바다는 태풍이 머물러 있었다. 검게 일렁이는 바다 위로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쳤다. 앞에서 덮치던 파도가 어느 순간 옆에서 솟구쳤다. 배 높이를 훌쩍 넘는 파도에 모두가 소리를 질렀다. 나 역시 무너졌고 손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섯 살 딸아이는 조그만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꼭 붙들고, 그 사이에 머리를 넣어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포를 이겨내려는 딸아이의 모습에 엄마인 나는, 고사리 같은 손도 잡아 줄 힘이 없었다. 외도에 도착했지만, 나는 선착장 의자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외도의 풍경도 즐기지 못하고, 화장실만 오갔다. 돌아가는 길에도 다시 그 배를 타야 했다. 나의 심장이 요동치듯 파도도 멈추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배를 타지 않는다. 배뿐 아니라, 물 위에 떠 있는 모든 것을 피하게 되었다. 몸이 먼저 기억해버린 공포. 그 기억은 나를 방어하듯 붙잡았다.


몇 년 후, 2019년의 사진첩을 넘기다가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멈췄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 사진 속의 나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맑은 햇살도, 바람도, 멋진 풍경도 기억에 없다. 얼굴엔 불안이 가득했고, 미소는 억지였다. 나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 차 따라간 부부 동반 여행이었다. 출발 전부터 나는 수없이 비행기 취소 방법을 검색했고, 배를 타야 한다는 사실이 온몸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기억나는 건 단 하나, '바다를 건너야 한다. 배를 타야한 다.'는 공포뿐이었다.


'혹시 배에서 숨이 막히면 어쩌지?' '타국에서 병원이라도 가게 되면?' 두려움이 여행의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멋진 레스토랑, 아름다운 골목, 새로운 인연...... 아무것도 기억에 없다. 머릿속에는 그날의 걱정들만이 남아 있었다. 일어나지도 않는 생각들을 멈출 수 없었다. 사진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에휴, 나는 왜 그 순간을 살아내지 못했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체력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체력이 약해지자, 공포스럽던 추억을 가져와 나를 보호하려 했다. 내 몸도, 아이도 지키지 못하던 그때의 공포가 나를 지배했다.


"정말 나는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다가오지 않은 불안에 추억을 뺏긴 건 아닐까?”


에너지가 차오르고 체력이 회복되니, 그제야 보였다. 내가 만든 트라우마는 '현실'이 아니라 '허상'이었다. 나약해져 있던 나의 불안이 만든 허상의 세계였다. 그래서 아주 작고 단순한 도전부터 해보기로 했다. 호수에 떠 있는 작은 배에 올라섰다. 발 아래가 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쳤다. 하지만 나는 살아 있었다. 숨을 쉴 수 있었다. '괜찮다.'


한번은 제주도 가족여행에서 우도로 들어가는 큰 배를 타야 할 일이 생겼다. 결심이 필요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찬찬히 마음을 살폈다. ‘차를 타는 거야’, '창밖은 보지 말자.', '배가 너를 죽이지 않아. 쓸데없는 생각을 멈춰.' 라고 하나씩 타협하듯 마음을 달랬다. 무너지지 않았다. 멀미도 없었다. '괜찮다.'


'빠지직-' 나를 숨겼던 알이 깨지기 시작했다. 검지로 작은 구멍을 내고 바깥을 보기 시작했다. 두려움은 체력이 바닥나면서 찾아왔던 감정이었다. 마음이 무너지고, 생각은 움츠러들었다. 시야가 점점 작아졌다. 그날의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은 결국 체력 위에 놓여 있다. 생각이 무너지는 건, 감정 때문이 아니라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를 다시 살린 건, 마음을 돌볼 힘. 체력에서 시작되었다.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더니 말끔히 괜찮아지는 일이란 없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날에 불쑥 튀어나오는 감정의 덩어리가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아주 작은 실천부터 시작했다. 도망치지 않되, 억지로 맞서지도 않았다. 나의 체력 리듬에 맞게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시작은 단순하지만 지겨운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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