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의 '일기'
그리고 토핑의 기록

영감 문장 01

by 부크럼
사랑하는 한 시절에 대한 기록,
일기 예찬론자 문보영 시인의 <일기시대>


저는 제가 경험한 힘든 일들에 대해 표현을 조금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나아진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렇게 바꿔 말하는 거예요. "불행한 게 아니라 좀 불편했다" 라고요. (일기시대_122p)


'불행한 게 아니라 좀 불편했다.'

똑같은 말이어도 표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표현에 따라 생각의 방향도 바뀌게 되는 것 같다. 물이 반이나 남아서 기쁠 수도 있지만, 물이 반밖에 안 남아서 슬퍼질 수도 있으니까. 불행과 불편도 어쩌면 조금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힘든 일을 마주했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살짝 불편했다고 생각하는 게 그 일을 더 가볍게 넘길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니까.


묵혀두었던 옛날 시들을 읽어보는 데 며칠이 걸렸다. 어디 가서 숨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후련했다. 나에게 나다운 것, 때 묻지 않아서 오히려 잘 쓰던 어린아이와 같은 시절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 처음 썼던 나의 시들이 너무 구려서 기뻤다. 깔끔하게 시작할 수 있어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거친 재능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애당초 그런 게 있었던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사실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일기시대_144p)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엉망진창인 것 같은 지금 내 모습이 싫어서, 조금 더 나았던 것 같은 그때로 도망가고 싶어 진다. 근데 나도 똑같았다. 그때의 나도 지금처럼 뭐 별것이 없었다. 돌아갈 곳은 없었던 거지. 대체 어디로 돌아가고 도망가고 싶다는 건지. 그래도 다시 뒤로 갈 필요는 없어서 다행인가 싶다.


무조건 평지만 걸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어려워지면 발을 빼는 거야. 왜냐면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얻지 않는 순간, 배움이 없는 순간, 성취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 버리는 시간, 그런 시간들을 용서하고 삶에 초대하는 것으로, 일명 '시간 갖다 버리기', '시간을 쓰레기로 만들고 기뻐하기', '그 쓰레기를 재활용하지 않기', '삶을 일정 부분 낭비하기'이니까. (일기시대_271p)


무언가 정말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아니 어쩌면 열심히 해야만 할 때, 항상 생각한다.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리고 '이것만 끝내면 아무것도 안 하고 쉴 거야.' 근데 막상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게 제일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또 제일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열심히 하는 것도 어렵지만, 쉬는 건 더 어렵다. 맨날 놀고 싶지만, 맨날 노는 것도 힘들다.




일기 쓰는 걸 좋아해서.

어쩌면 그냥 일기가 좋아서.

일기 쓰는 일기 예찬론자를 좋아하게 된 걸지도.


지금도 그렇지만 유튜브 채널 '민음사 TV'를 좋아한다.

특히나 화진, 기현 편집자님이 나오는 시리즈를 정말 좋아했다.


<일기시대>는 두 편집자님이 기획한 에세이 시리즈 '매일과 영원'의 첫 도서였고, 민음사에 대한 팬심으로 읽게 되었다. 작가님에 대해 몰랐고, 기대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책을 통해 작가님의 팬이 되어 일기 딜리버리는 물론 작가님 유튜브까지 구독하는 토핑이 되었다.


(*토핑 : 작가님 유튜브 구독자 애칭)

keyword
작가의 이전글네가 나에게 올 때까지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