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희망의 기로에 서서
사회의 곳곳에서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요즘, 음악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음악계 중에서도 인디계. 인디계 중에서도 밴드 음악. 그리고 주목할 만한 건,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선두주자들이 대부분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 물론, 남성 또한 오래전부터 버팀목의 역할을 꾸준히, 묵묵히 지켜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음악계에, 특히 인디계에서 남녀의 비율이나 역할을 따지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면서도 무의미한, 오히려 분란을 일으키는 프레임일 것이다. 다만, 조금은 새로운 현상으로 주목해 보는 것이니, 그저 재미로 들어주길 바란다.
바야흐로 밴드 음악의 시대가 다시 오는가. 인디 음악은 오래전부터 꾸준히 제자리를 지켜오고 있고, 그중에서 밴드의 역할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만하다. - 밴드를 빼고 누가 인디를 논할 수 있겠는가 - 그리고 그런 밴드 음악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예전부터 크게 성장해 왔다. 자우림의 김윤아, 디어클라우드의 나인, 롤러코스터의 조원선, 허클베리핀의 이소영 등등 상징적인 인물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최근 인디 밴드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여성의 역할은 또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는 데서 또 달리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흐름은 우선 언더 그라운드와 오버 그라운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주도하는 역할을 밴드가 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혁오를 필두로 하여(무려, <무한도전>에 출연했다), 최근에는 잔나비에 이르기까지(잔나비는 인디밴드를 넘어 국민밴드를 향해 가고 있다), 인디 출신의 밴드들이 K-POP 아이돌이 지배하고 있는 국내 가요계의 획일성을 분산시키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인디 밴드의 오버 그라운드 진출은, 오버신에서도 인디신에서도 큰 활력소가 되어주고 있으며 그 둘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가요계의 다양성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 물론, 그런 케이스는 소수에 한정되며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긴 하겠지만 - 심지어는 오버 그라운드에서 언더 그라운드로 역진출하는 현상마저 생기고 있다. 무려 JYP 아이돌 출신인(개인적으로 팬이었던 15& 멤버) 백예린과 슈퍼스타K와 윤종신의 미스틱 출신인 김예림(인디에서는 'Lim Kim'이란 이름으로 활동)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인디신과 오버신의 혼재를 주도하고 있는 새로운 흐름의 최전선에, 요즘에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밴드가 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새소년(단순히 보컬이 아닌, 밴드의 프런트를 황소윤이 맡는다)으로부터 발발하여, 최근에는 단연 한로로(밴드 구성은 아니지만 록 기반의 밴드 음악을 하고 있다)를 통해 그 폭발을 맞고 있다. 한로로는 인디 신에서 경쾌하고 희망적인 대중적 록 사운드를 구사하며, 그 인기가 인디계를 넘어 가요계 전체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이미 '인디계의 아이돌'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은 록 사운드에 기반한 밴드 음악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아이콘과 같은 상징적 존재로 거듭나고 있다는 데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러니까, 인디계에서 발발하여 가요계를 점령하는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퀸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의미. - 킹이라고 한다면 잔나비가 있으려나 - 인디신에서 오버신으로 진출한 밴드(남녀를 불문하고)는 많았지만, 굳이 필자가 '새로운 흐름' 운운하는 데는, 단지 인디 음악의 대중성 확보에만 그 의미가 있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음악이 하나의 음악 현상을 넘어 청춘의 (방황하고 휩쓸리는) 문화를 대변하는 아이콘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역할을 유일하게 떠맡고 있던 K-POP 아이돌과는 다르게, 그리고 조금은 더 건강한 아이콘이 되어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는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의미를 가진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신들만의 청춘 문화를 상실해 가고 있으며 - 이와 관련해서는 장강명의 『표백』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각종 불량식품의 자극들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그들에게, 어떤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단지 위로와 응원을 넘어, 그들이 더 이상 기성세대의 작위적 질서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들만의 정체성과 문화를 확보하고 지탱해 갈 수 있는 버팀목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콘의 역할을 K-POP 아이돌과 같은 자본화되고 상품화된 음악이 아닌, 자유와 저항을 노래하는 인디 밴드가 해준다는 건 - 자유와 저항은 록의 정신이 아니던가 - 더더욱 주목할 만한, 희망의 단서가 되어준다. 그런 중요하고 의미 있는 흐름의 한가운데, 여성 주도의 밴드 음악이 있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는 새로운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아마도 국내 가요계가 시작된 이래, 이런 현상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 밴드 음악에서 여성의 역할은 대체적으로 항상 주변부에 머물지 않았던가, 혹은 팬덤의 역할이었던가 - 이러한 새로운 현상은 비단 남녀차별 해소의 문제를 넘어, 다양성 차원에서도, 건강성 측면에서도 희망적인 측면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한다. 절망할 일만으로 가득 찬 요즘의 세상에서는 더더욱이나 말이다. - 그렇다고 남성성이 폭력적이기만 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남녀 대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다양성과 새로움, 그리고 희망의 흐름이 이 글의 주된 방향이다.
이제, 청춘 문화를 형성해 주는 진원지로서 대중음악의 아이콘은 K-POP 아이돌에서 밴드 음악으로 옮겨가고 있는 듯하다. - 너무 성급한 결론일지도 모르겠지만 - 한로로는 아마도 그 역할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떠맡는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이 될 것이다. 그런 아이콘의 역할에서 기존의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아이유와 BTS와 블랙핑크로 대표되는 몇몇 아이돌 그룹은 계속해서 그 위치를 이어갈 테지만, 이제 보다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판타지의 속삭임보다는 현실과의 대면 속에서 희망을 구출해 내려는 밴드 음악이 그 바톤을 이어받게 될 것이다(그렇게 되길 바란다). '어둠의 아이유'라 불리는 비비 - 개인적으로 굉장한 팬이다 - 또는 여성 아이돌 밴드를 지향하는 QWER의 두각은 그런 새로운 흐름을 준비하는 예비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참고로,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본 글이 취하고 있는 대중음악의 문화적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K-POP 아이돌 문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우려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그들의 무분별한 상업성과 중독적 팬덤문화의 측면에서), 문화적 현상이 아닌 음악으로만 보았을 때는 그들의 음악을 그렇게 쉽게 얏잡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국내 K-POP 아이돌의 음악적 디테일과 감상의 쾌감은 감히 폄하할 수 없는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필자는 아이돌 음악을 오래전부터 즐겨 들어왔으며, 아직도 덕질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보다 조금 더 앞서 새로운 흐름을 경험하고 있는 일본을 보면, 국내에 불어닥칠 바람을 미리 짐작해 볼 수도 있다. 현재 일본의 음악은 아이돌 음악 산업이 극단적인 침체에 이르면서 오버 그라운드가 붕괴되고 있는 실정이며, 이렇게 무너진 일본 가요계를 인디신 출신의 싱어송라이터들이 구출해내고 있다. - 대표적으로는 요네즈 켄시와 요아소비, 요루시카 등을 들 수 있겠다 - 그리고 그 가운데 청춘들의 아이콘 역할을 하고 있는 뮤지션이 바로 '아이묭'이다. 그녀는 포크 록을 기반으로 하여 날 것의 음악을 추구하는데, 신기한 것은 그녀의 음악이 오버 그라운드에서 크게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 이렇게 화려하고 자극적인 시대에 포크 록의 성공이라니 신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그리고 현재 일본의 가요계를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음악은 단연 록 기반의 밴드 음악이다. - 현재 가장 정점에 있는 밴드 Mrs. GREEN APPLE을 비롯하여, 오피셜히게단디즘, King Gnu 등이 있겠다 -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일본의 그런 현상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국내에도 그런 밴드 음악의 바람이 불어닥치기를 조용히, 하지만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한로로라는 한 여성을 통해 그 희망을 보고 있다. 또 한편으로 언급하고 싶은 뮤지션으로는, 아직은 신인이지만 올해 인디신의 신선한 바람으로 주목받고 있는 우희준의 음악에서도 또한 희망을 본다. 한로로보다는 훨씬 더 날 것의, 그리고 절망을 가감 없이 직시하는 냉엄한 시선을 보여주는 그녀의 음악은 가히 '어둠의 한로로'라 할 만한다.
몇 년 전 악뮤의 이찬혁이 <쇼미더머니>에 출현해서 "어느 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라는 가사 한 줄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강렬했던 그 가사 한 줄은, 그후 아직까지도 그 힘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맴돌고 있다. - 그런 의미에서 최근 방영하고 있는 <쇼미더머니 12>의 성공여부는 힙합신의 회생과 미래에 큰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본다 - 어떤 말이 시대적인 힘을 가진다는 건, 단지 그 말에 담긴 의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대적 현상을 관통하는 어떤 지점이 있기에, 그리고 그것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힘이 실리게 되는 것이다. 한때 국내 가요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음악으로 힙합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지만, 왠지 요즘의 힙합신은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아주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고대해 마지않는다.
언제나 시대는 항상 절망과 싸워왔으며, 그 가운데 희망을 놓지 않는 정신이 그 시대를 지탱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의 영향력과 대중적 확산에 음악은 큰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인류의 문명이 생겨난 이래, 절망과 희망의 절대적 기로에 놓여 있는 시기라고 생각되는(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지금의 시대를 구원할 새로운 흐름을, 밴드 음악에서 찾고자 하는 건 필자의 과한 기대이자 욕심일까.
오늘도, 한로로와 우희준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나 혼자 그런 망상의 기대와 희망에 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