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자리를 찾는 겸손과 지혜
창작에서 글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원고, 콘티, 대본, 극본 등 어떤 콘텐츠라도 글로 먼저 정리한다. 글을 써본 적 있는 사람들은 문장 하나, 대사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작업하고 싶은 주제에서 진지한 공부와 탐구는 꼭 진행돼야 한다. 아는 것이 있어야 문장에 성경적 메타포를 올바르게 담을 수 있다. 그렇게 제작된 내용은 독자에게 작품의 맥락 속에서 신앙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기쁨을 얻게 할 수 있다.
C.S. 루이스의 원작 영화 나니아 연대기 2편인 「캐스피언 왕자」에서 아슬란(예수님을 상징하는 사자)이 그 백성들이 전쟁에서 패할 위기에 처해있을 때까지 자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루시가 아슬란을 직접 찾아왔을 때 비로소 아슬란은 루시와 함께 백성을 구하러 간다. 아슬란을 발견했을 때 루시는 이렇게 묻는다.
‘왜 진작 구해주러 오지 않으셨나요?’ 그러자 아슬란은 이렇게 답한다. ‘같은 일은 두 번 반복될 수 없단다’
그 후 아슬란은 그 백성에게 단번에 승리를 가져다준다. 아슬란의 행동과 대사에서 크리스천은 성경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 전쟁 내내 방관만 하다가 루시가 찾으니 한 번에 승리하게 해주는 흐름이 억지라고 비평하면서 말이다. 처음부터 같이 싸웠거나, 아슬란이 백성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비슷한 전개가 J.R.R. 톨킨의 소설이자 영화로 더 유명한 「반지의 제왕」에서 나온다. 2편 ‘두 개의 탑’에서 악을 상징하는 오크족들과 거대한 전쟁 중 점점 기세가 기울어질 때, (백색의 마법사) 간달프가 용병을 끌고 언덕 위에서 나타난다. 간달프와 용병들이 태양의 빛을 받으며 언덕에서 질주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지고 있던 전쟁은 결국 승리에 이르게 된다. 짜릿한 역전승은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두 영화는 모두 지고 있던 전쟁이 막강한 힘의 도움으로 단숨에 이기는 서사를 갖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장면에서 통쾌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복음은 사람의 상식과 논리로 판단할 수 없다. 그 복음 메시지를 담고자 대중의 기호보다 본질적인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해야 함이 중요하다. 물론 그 내용의 개연성도 적정선을 지켜야 한다. 일반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지킬 때 메시지의 흡입력은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창작자는 본질적인 의미를 어떻게 흥미롭게 전달해 나갈지를 고민해 나가야 한다.
어떤 매체든 기독교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작가는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자기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실 모든 크리스천이 그래야 하는 게 더 맞다) 그 이유에 대해 ‘작품을 더 의미 있고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만 접근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진짜 삶의 전도자로 살아가기 위한 실천을 위해서다.
만일 당신이 복음과 말씀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성경의 내용으로 멋진 작품을 창작했다고 가정해 보자. 어느 날 그 작품의 내용에 감명받은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작품에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성경의 내용으로 창작했다고 하는데,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나에게 복음을 한번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은 당혹스럽다. 물론 멋진 기독교 창작품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사실 복음에 대해서 깊게 몰랐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게 부담스럽다. 오히려 잘 모르는 내용을 말했다가 문제가 생길까 무섭다. 또 종교적인 작업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자신의 얕은 신앙 지식이 드러날까 봐 두렵기도 하다. 그럴 때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참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잘 아는 존경하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분들이 당신에게 복음을 제대로 설명해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잘 넘겼다고 했을 때, 방문객은 다시 한번 부탁한다.
“나는 이 작품에 관심이 생겨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의도와 함께 작가님에게 복음을 듣고 싶습니다.”
당신은 다시 당황하지만, 이번에도 경건한 행위로 잘 포장하며 완곡하게 거절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조심스럽습니다.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을 떠나간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겠지만, 아예 없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럴 때 위의 사람처럼 반응할 수밖에 없다면 자신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순간일까. 무엇보다도 복음을 위한 창작이라고 일컬어 종교적인 명성까지 얻었다면 말이다.
전도의 모든 상황은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다. 복음을 듣고 싶은 사람, 듣기 위해 찾아온 순간, 나는 입으로 그 진리를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상황에서 복음을 직접 전할 수 없다면 그 순간 찾아오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부끄러움일 뿐이다.
배움의 자리를 찾는 겸손
크리스천 창작자로 살아가고자 결단하는 모든 분에게 배움의 자리를 찾는 열심히 있길 축복한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기도하며 자신의 작업에 축복을 구하면서, 정작 성경은 알고자 하지 않는다면 위선이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종교적인 색의 창작은 진행하고 싶지만, 그 작업의 결과로 내가 직접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면 마음의 중심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창작자는 작업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며, 진리를 향한 지적인 호기심을 추구해야 한다.
당신이 창작을 통한 사명감이 있다면 현재 단계에 올라서야 한다. 세상의 일과 겨루어야 하는 길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셨고 이를 믿으라고 명하셨다. 능력주의 세상조차도 예수님은 이기신 것이다. 실제로 복음서에 예수님의 논쟁을 읽다 보면 얼마나 지혜롭게 이기셨는지 무릎을 '탁' 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 등 행하신 능력은 세상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 크리스천이라면 타인을 바라볼 때 능력(경제력, 스펙, 외모 등)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무능력을 신앙으로 포장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 따라 세상을 이기고 그 중심에 서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노력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무책임할 뿐이다.
불성실한 종일뿐이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창작은 재밌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기능적인 실력과 전문성을 정말 꾸준하게 발전시켜나갈 때
크리스천 창작자의 실력과 소양이 동시에 갖춰질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창작(꿈)을 위해
어떤 공부와 노력을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