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스스로 생각해봐도 품위 없게 느껴지는 근심이 있다. 웅장하지도, 고결하지도 그래서 겸손하지도 못한 그렇고 그런 근심들. 질투, 경쟁, 불안 그런 것에 얽혀있는 근심들. 그동안의 나의 근심이란 게 그랬다. 젊을 때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이가 들어가면서조차 그런 근심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매우 어리석다. 그런데 최근 나는 애월읍 어음 작업실에 있으면서 의미심장한 변화를 경험했다. 사실 어음의 일상은 매우 불편하다. 시골집의 불편은 어느 누구의 상상보다도 심하다. 결코 익숙하기 어려운 불편이다. 그런데 그런 불편을 겪으면서 나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삶의 멋과 맛을 새로이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여름에는 마루에 널브러 앉아 글을 쓰지만 가을이 되면 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자기 방에 있다는 편안함을 가장 달게 느낄 수 있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난 특히 불편한 어음 작업실에서 그런 편안함을 즐긴다. 어음에서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차를 마시고, 혼자 풀을 뽑고 그렇게 외로우면서도 행복한 것은 자기 방 한구석에 홀로 편안히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은 관계만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이라 믿지만 고립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글쓰기이다. 가을의 글쓰기는 더욱 그렇다. 가을의 맑은 날, 바람이 불자 이삭들이 흔들리며 물결 되어 번지는 그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이삭들이 몇개의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닌지 착각에 빠지곤 하는데 그럴 때 어음 작업실 방으로 들어와 나는 어음의 바람에 대해 글을 쓰곤 했다.
보았지만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눈에 번쩍 띄면서 우리를 압도하는 경우가 있다. 가을의 어음 바람이 내게 그랬다.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 런던에는 안개가 없었다는 말이 있다. 마치 내가 쓰기 전에는 어음에 가을바람이 없었음을 강변하고 싶은 듯이 나는 쓰고 또 썼다.
그런가하면 어음에서 가장 귀찮은 것이 풀 관리다. 어음의 내 작업실 마당은 넓어서 예초기로 사흘이 멀다하고 풀들을 잘라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가는 금새 마당은 풀들로 점령된다. 그 위세가 어느 정도냐 하면 자르고 뒤돌아서면 또 자라고 있을 만큼 대단하다. 그래서 예초기를 곧잘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난 기계를 잘 다룰 줄 몰라 고장이 잦다. 그래서 며칠 미루다보면 마당은 말 그대로 난리가 된다. 이렇게 되면 재앙은 거의 필연적이다. 모기들의 공습 때문이다. 시골 모기들은 왜 그렇게 공격적인지 물파스와 모기향 정도로는 감당이 어렵다.
영국의 시인 콜리지는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 어음의 이런 저런 불편 덕분에 나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던 것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것을 오히려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경험일 수밖엔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글은 다른 어느 때 쓴 것보다도 향기가 좋았다. 이를테면 최근 나는 ‘벌레’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었다. 내 작업실에 빈번히 출현하는 벌레들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는 점에서 나는 어느새 달라졌다.
이렇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로부터 탈피하면서 나는 그동안의 나의 근심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품위 없는 것들인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 안다고 해서 당장 그런 근심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생활의 불편 덕분에 그런 근심들의 문제를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놀라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