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일 때문에 몇 주 어음작업실에 가보질 못했다. 그러다가 토요일에 도시락을 싸들고 집사람과 함께 나섰다. 집사람은 작업실 텃밭에 심어논 고구마를 일찍 캤어야 했는데 추위 때문에 얼어 다 썩었을 거라고 아쉬워했다.
어음 작업실은 냉골이었다. 보일러를 켜고 방이 데워지는 동안 우선 보이차로 추위를 달랬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으면서도 부부만의 시간을 오래가질 수 있는 것으로는 차만한 게 없는 듯했다.
새 보일러 성능이 좋아선지 방바닥이 금새 따뜻해졌고 집사람이 고구마를 캐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텃밭으로 나가자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집사람은 밭일을 하고 나는 글을 쓰고 어음에서 우리는 대개 그랬다.
나는 작업실을 와여(蝸廬)라 부른다. ‘달팽이집’이라는 뜻이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머물던 거처를 두고 그렇게 불렀던 것을 빌린 것이다. 작업실에 나는 달팽이처럼 느리게 글을 쓴다.
글을 쓰는 동안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나의 이해를 넘어설 때, 어음의 시간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결코 놀랄 일은 아니라고 내게 말해 주고, 나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한계를 인정하게 해준다.
또한 어음의 시간은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나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준다.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나의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나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들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기에 나는 내 작업실을 그 어디 보다 좋아한다.
그나마 얼지 않고 남은 고구마가 있었던지 집사람은 밭에서 나오질 않았다. 나도 마지막 원고 때문에 집중할 수밖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점심이 되었다. 싸들고 온 도시락을 따뜻한 방바닥에 펼쳐놓고 흙투성이가 된 집사람을 불러들였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며 자식 일이니, 집 안 일이니, 학교 일이니 자질구레한 세상사들은 잊은 채 오로지 고구마 이야기만 했다. 오일장에 고구마 줄기를 사러가던 이야기, 생각보다 비쌌던 고구마 줄기 이야기, 그것을 돌밭에 심느라 애썼던 이야기 등등. 이야기는 드디어 삶은 고구마와 곁들여 먹을 김치로 이어졌다. 집사람은 삶은 고구마엔 배추김치가 좋다고 했고 나는 동치미가 좋다고 우겼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들 어떠리.
점심을 먹고 겸사겸사 나도 밭으로 나가 보았다. 그런데 왠걸, 집사람이 캐논 고구마가 썩은 것도 있었지만 알도 굵고 온전한 것들이 더 많았다.
그나마 고구마는 땅 속에 있어서 제 몸을 보전할 수 있었겠지만 농작물들이 추위를 견딘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추위란 일종의 두려움이며 불확실성이다. 절망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서 썩어버린 고구마처럼 폐기될 것이냐 아니면 그 추위 속에서도 잘 버텨낸 고구마처럼 온전하고 더 굵어질 것이냐, 우리 인생도 그런 가늠길에 늘 서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일련의 열정이며 낙관주의일 것이다.
이번의 겨울 추위를 견뎌낸 내 텃밭의 고구마들은 그러기에 희망의 증거들이다. 컨테이너로 두개 가득 수확을 하고 흙을 씻어내며 그것들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눠줄 작은 흥분으로 우리 부부는 또 설레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글을 쓰는 동안 집사람은 고구마 캐기에 힘이 부쳤던지 따뜻한 방바닥에 등을 맡기자마자 깊은 오후 잠에 빠져들었다. 농부의 아내라 해도 결코 모자라 보이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