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네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네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흘려 말했었다.
치장하고 나가야 하는 관계 말고
집 앞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 나가서
편의점 앞에 나란히 앉아 맥주도 마시고
함께 만화책도 빌려 보는 사이.
어느 날 저녁을 지었는데
생각보다 맛있고 양이 넉넉한 날
"우리 집 와서 밥 먹어."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래도, 사랑>이라는 책에 이런 말을 적었다. 하지만 정작 동네 친구를 사귀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서점주인이 되고 1년이 지나니 동네 단골들이 생겼다. 연남동 서교동 망원동 연희동에 특별히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인지,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특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매주 찾아와 책을 주문하거나, 한 달에 한 두번 서점에 들러 안부를 물어오는 손님들은 하나 같이 결이 곱고 목소리가 나즉하여 그들이 떠난 자리엔 향기와 여운이 남는다.
물론, 그 중에는 목소리가 씩씩하고 패기가 넘치는 단골도 있는데 마침 손님이 없던 오후 그녀는 까만 비닐봉투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우리 전에 봤죠?" "예.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그녀는 보통 손님들이 앉는 책상이 아닌, 내 작업 책상에 앉았다. 술 냄새가 났다. "어디서 치킨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라며 웃었더니 자기 점퍼에 코를 묻고는 "냄새 나요? 치맥 했어요. 낮맥." 하며 껄껄 웃는다. 낮술이라 가볍게 마셨다고는 하지만 취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전에 왔었어요. 라디오 수업할 때." 성큼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라디오 클래스를 열고 있다. 대체 이 나라에는 라디오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글 쓰고 구성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이 없다. 20년을 일했으니 내가 체득한 것을 나누면 좋겠다 싶어서 시작했는데, 라디오를 좋아하는 직장인들이 꽤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질문 시간이 되면 '일하는 자로서의 고단함을 어떻게 달래는가, 권태나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는가?' 묻곤 했다. "행복은 joyful이 아니라 meaningful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듣고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어요. 보람 있는 일을 할 때 기운이 났어요. 일이 힘들면 쉬라고 하지만 저는 일이 힘들고 지루할 때면 다른 일로 극복했던 것 같아요. 매일 계속되는 라디오가 지루하면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요. 가장 좋은 건 청취자를 초대하거나 찾아가는 거예요. 그분들이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만드는 방송이 허공 중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구나, 사람들을 웃게 하고 힘나게 하는구나, 나도 덩달아 힘이 나거든요." 정말 그랬다. 예전에 야학에 가서 공개방송을 한 적이 있다. 요즘 야학에는 배움의 때를 놓친 어르신들이 많았다. 공개방송 라인업을 GMF급으로 짠 다음에 '야학에 책을 보내주면 공개방송 초대권을 보내주겠다' 공지를 했더니 많은 청취자들이 야학으로 참고서도 보내고, 어르신들 드실 간식도 보내주었다. 그 중 3백명을 초대해서 공개방송을 열었다. 첫 무대는 옥상달빛.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노래가 흐르자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당시 DJ가 최강희씨였는데 노래가 끝나고 물었다. "할머니 왜 우세요?" 할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고마워서 그래. 수고했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진행자와 제작진, 출연가수까지 모두 울었다. 당시 나는 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엇는데 할머니의 고맙다는 말씀 덕분에 단번에 이겨낼 수가 있었다. 그 이야기가 그녀에게 힘이 됐다고 했다.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스스로 만들자' 결심하고 이것저것 해보았더니 누워있던 마음이 일어났다며 웃었다.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서 왔어요."라며 그녀는 작은 선물을 건넸다. "저 독립했어요. 작가님 이야기 듣다보니 독립하고 싶어져서요. 30대 후반인데 어머니한테 오래 얹혀 살았죠. 성산동으로 이사왔어요. 앞으로 종종 들를게요." 그 후에도 그녀는 불쑥 서점을 찾아와서 큰 소리로 웃다가곤 한다. 웃음소리가 시원해서 덩달아 에너지를 얻는다.
'소나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이제는 단골이 된 손님이 맨 처음 오던 날도 기억난다. 하얀 얼굴에 볼이 빨갰다. 수줍게 앉아 있더니 다른 손님들이 나가고 홀로 남자 "저, 작가님."하고 말을 건넸다. 우리 서점에 들어오면 칠판에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책을 추천해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사랑 고민을 털어놓는 손님들은 나무씨처럼 수줍은 얼굴로 들어와서 다른 손님들이 있으면 조용히 한쪽에 앉아 있다가 혼자가 되어야 말문을 연다. (물론 사람들이 있을 때 고민을 꺼내놓아 작은 책상이 연애 토론장이 될 때도 있다.) 처음 왔을 땐 애인과의 서로 다른 취향 때문에 고민하던 나무씨는 "주말을 각자 즐기고 저녁 늦게 만나면 안 되요?"라는 나의 조언이라고 할 것도 없는 말에 "용기를 내서 말해보겠어요"라고 하더니 몇 달 뒤 찾아와 "저 결혼할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볼이 더 빨갰다. 그 후로는 정말로 주말을 자유롭게 보내게 된 모양으로 매주 책을 주문해놓고 떠났다가 다음 주가 되면 "책 왔어요?"라며 고개를 내민다. 계산을 하고 새로 산 책을 읽다가 7시쯤이 되면 "남자친구 만나러 가야해요"라며 일어서는데 뒷모습마저 귀엽게 설렌다. 내내 수줍기만 하더니 이젠 익숙해져 제법 용기가 나는 모양으로 "여기 서점에서 친구를 사귄 분들이 있다면서요? 저도 도전해봐야겠어요."라며 웃는다.
올 때마다 꼭 한 권씩만 사가는 손님도 있다. 남자분인데 "존 버거의 <아내의 빈 방> 말이에요. 아, 이거 읽으면 울 것 같아서 못 보겠어요."라며 말을 걸었다. "분명 울게 될 거예요."라고 하니 "못 사겠어요. 용기가 안 나."라며 떠났다. 그러고는 잠시 후 SNS로 연락을 해왔다. "아내의 빈 방 팔지 마요." 다음 주에 들러서는 그 책을 사갔다. 연희동에 사는데 주말이면 동네를 산책하며 서점도 가고, 전시도 보고 영화도 본다고 했다. "이 책 읽고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 나중에 이야기해주세요."라고 하니 문을 나서며 말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라는 말은 확신을 준다. '나쁘지 않게 해나가고 있나보다'는 확신. 쌓여갈 것이라는 기대. 더불어 긴장감도 준다. 단골손님들은 하나같이 취향이 굉장하고 호기심이 많은 분들이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덕분에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읽기를 미뤘던 책'들을 찾아보게 된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커가고 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단골손님은 물론, 동네친구도 생길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