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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May 06. 2019

길 끝에서 무엇을 만날까.

어릴 때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이사하던 날이었다. 어머니가 바로 집 앞 구멍가게에 가서 라면을 사오라고 하셨는데 돌아오다 길을 잃었다. 아무리 가도 내가 찾는 집은 나오지 않았고 급기야 서러워졌다. 펑펑 울며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나는 물었다. "우리 집 어딘지 아세요? 우리 집 모르세요?" 한참을 훌쩍이며 걷는데 모퉁이를 돌자 어머니가 나타났다. 안아주던 품을 잊지 못한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라디오에서 20년. 그만 둘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에 PD는 말했다. "다른 분은 몰라도 작가님은 박수 받으며 떠나게 해드리고 싶어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프로그램이 상승세이니 하고 싶은 것 실컷 하고 기쁘게 떠나게 해주겠다 했다. 진심이었다는 걸 알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비겁한 자로 남았다. 


그만 두려고 했던 것은 결과적으론 건강 때문이었다. 


방송이 마음처럼 되어주지 않았다. DJ와 제작진은 마음이 맞지 않았다. 우리 제작진은 그와 함께 가기 어렵다고 판단했지만 공교롭게도 청취율이 상승세였다. 간부들은 교체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어긋난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고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응급실로 뛰어가던 날, 방송 중에 DJ가 짜증을 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돌아와서는 제작진과 상의한 바 없는 이벤트를 발표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검고 진득한 아스팔트가 속에서 끓어 오르는 듯했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지쳐 떨어진 PD는 바로 퇴근했고 작가진과 저녁을 먹었다.


"선배. 이제 우리 어떻게 해요?"


후배가 나에게 묻는 것은 당연했다. 20년차 메인작가였고 대외적으로는 DJ와 절친해보였다. 제작진은 혼란스런 상황의 돌파구가 내게 있다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DJ에게 거리를 두기 전까지 우리는 매우 팀워크가 좋았다. 후배들이 맞았다. 내 책임이었다. 멀어진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애초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어야 맞았다. 노력이야 했지만 관계가 어디 뜻대로 되던가. 메인작가와 DJ가 과도하게 사이 좋다가 한순간 틀어지는 경우야 라디오에서 흔한 일이었다. 우리는 멀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멀어졌고 DJ는 한 발 물러선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대로는 방송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그만 둔다고 했을 때 그냥 놔두지 않고"


핑 돌았다. 눈 앞의 세상이 뒤집어졌다. 소용돌이에 갇힌 느낌으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해요."


온 몸이 싸늘해졌다. 물을 마시고 숨을 크게 쉬었다. 몇 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보니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후배들이 보였다. 현기증은 가라앉았다. 


"정말 우리 DJ는 왜 화가 난 걸까요?"

"실은 어제 내가...."


늦은 밤 걸려온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타인의 고민을 들어주기 힘들 때가 모두에게 있지 않은가. 나는 고단했다. 


"실은 어제 내가....."


말을 꺼내는데 나의 푸른 다리가 생각났다. 두달 전부터 피부에 이상 반응이 일어났다. 멍이 든 것처럼 푸르고 검은 반점이 다리 곳곳에 생겼는데 한 달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피부과에 갔더니 '망상청피반'이라고 했다. 10년 넘게 내 피부를 관리해온 선생님은 말했다. 피부질환의 90퍼센트는 원인이 밝혀져 있지 않아요. 우리 몸의 독성은 호흡을 통해 밖으로 배출되는데 피부도 실은 호흡 기관입니다. 독성이 빠지지 않는 거예요.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일 거고요. 


아침에 샤워를 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과도한 스트레스로부터 왜 나는 나를 구출하지 못하는가. 책임감이라는 착각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견뎌주세요. 선배가 없으면 우리는 어떡하나요.' 후배들을 목소리가 귀에 울려 다시 기운 차려 출근을 하곤 했었는데.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들에게 실은 오늘의 혼란이 어제 나의 무응답 때문이었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다시 눈 앞의 세상이 뒤집어졌다. 더 격렬한 현기증이 밀려 들었다. 


"택시 좀 잡아주겠니?"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달리는 택시 안. 죽음에 대한 공포에 숨이 막혔다. 


"현기증이 나요."


응급실 의사는 눈과 귀부터 검사했다. 이상이 없다 했지만 컴퓨터에 떠오른 진료 기록을 보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CT실에 연락해줘요."


한밤의 CT실은 두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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