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점님, 호박 사주세요"

- 서점의 색다른 기능, 1인 가구끼리 서울 식구 만들기

by 서점 리스본

"정서점님, 호박 사주세요"

서점에 새로운 스태프가 들어왔다. 울산 출신 그녀는 서점 근처에서 자취하며 대학에 다닌다. 독서실 멤버로 지내며 유심히 지켜보다가 "여기서 일해보지 않을래요?"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처음 독서실 오던 날, 그녀는 낡은 페이퍼백 해리포터를 읽고 있었다. 영문판이었다.
"좋아해서 여러 번 읽었어요". 독서실 최연소 멤버였다.
책보다는 서점에 관심을 갖게 되서 참여한 케이스였다.
실은 책보다는 차, 서점 옆집 티크닉 고객이었다. 티전문점이다.


인도에서 자랐고 영국문화와 친숙한 그녀는 차를 좋아했다. 제대로 된 영국티를 마시고 싶어하던 그녀에게 티크닉은 보물 같은 장소였다. 마침 티크닉에 들어선 서점 주인과 대화를 나누게 됐고 한번 서점에 발을 들인 후엔 티를 마시며 읽는 책에 맛을 들였다. 선배들이 추천해주는 책들을 흥미로워하며 읽었고, 비밀책이 배송되면 DM으로 반응을 보내왔다. 솔직하고 당찬 성격이라 금요일반 선배들이 '회사생활의 슬픔과 슬픔과 슬픔과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던 다음 날엔 '수요일반으로 바꿔주세요'라고 요청하기도 했었지만 대체로 잘 어울렸다. 호기심이 많이 뭐든 배우는 자세라 선배들에게 이쁨을 받았다.


이병률 작가의 <혼자가 혼자에게>가 출간된 주였다. 바로 읽고 독서실 멤버들에게 한 구절을 읽어주었다. 타지 생활이 길어져 서울이 그리울 때면 작가는 계란을 한 판 산다고 했다. 두툼한 계란말이를 해서 뜨거울 때 훌훌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해져 향수를 달래고 여행을 계속 할 수 있다 했다. 조리과정을 어찌나 맛깔스럽게 써두었던지 읽는 내내 독서실 멤버들은 입맛을 다셨고, 집에 돌아가서는 '야식 사들고 집에 왔어요'라며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그녀가 보내온 '대왕계란말이에요'라며 보내온 사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음 주 독서실에서 계란 말아서 같이 먹어요!'라고 답을 보냈다.


"저 계란 잘 못 마는데."

"괜찮아요. 여기 요리 잘 하는 멤버도 있어요."


다음 주 책 읽는 내내 멤버들은 계란말이를 기다렸다. 그들이 책 읽는 동안 나는 그녀의 분부대로 양파와 당근을 다졌다. 해당 출판사의 마케팅 부장님이 지나는 길에 들렀다며 방문하시고는 '우리 출판사가 해야할 일을 리스본이 하네요'라며 허허 웃었다. 앞치마 두르고 칼을 들고 있는 나를 낯설어 하시면서. 케찹이 없다는 말에 동네 주민 한 분이 케찹을 사들고 뛰어와 주시기도 했다.


계란은 잘 뒤집어지지 않았다. 당황하는 그녀를 도와준 것은 비 오는 날, 수육을 해서는 서점을 찾아오던 독서실 멤버였다. '정서점님 영양보충이 필요해보여요. 마당에 나가서 수육 드세요. 제가 잠깐 서점 봐드릴게요'라며 고기가 담긴 밀폐용기를 내밀던 청년.


둘은 나란히 서서 계란을 말았고 나란히 집에 돌아갔다. 청년은 서점에서 5분 거리에 살고 있는데 다음 날 서점을 방문해서 말했다.


"밤길을 혼자 가길래 환한 곳까지 데려다줬는데요,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어요. 지방에서 올라온 20대에게 서점이 마음 붙일 곳이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저는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 옷가게 주인에게 마음 붙여서 옷을 정말 많이 샀거든요."


웃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상상 못했던 지점이다. 지방 자취생들의 마음 붙일 곳이라니. 계란말이 법썩 덕분에 중요한 걸 깨달았다. 이후, 몇몇 20대 단골들이 나를 정서점 대신 '서울 엄마'라 부르기 시작했다.


계란을 말던 그녀는 서점에 오는 좋은 사람들의 매력에 빠져 들었고 급기야 같이 일하게 되었다. 어제 본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녀가 뛰어 들어왔다. 국화 화분 둘을 양손에 들고 있는데 크라프트지로 화분을 감싸고 위에 할로윈 호박에 붙일 법한 눈과 입이 검은 색지로 붙어 있었다.


"해피 할로윈! 이번 주말이 할로윈이라 매장에 할로윈 느낌 내보려고 샀는데요, 허락 받고 두려고 왔어요. 2호점에 놔도 될까요?"

"당연하지."

"어디다 둘까요? 제가 둘 곳을 생각해봤는데요... "


놓을 곳을 상의하다말고 대뜸


"호박도 사고 싶었는데 플라스틱으로 된 것밖에 없더라고요. 우리 서점은 플라스틱 싫어하잖아요."

"그래서, 호박 사달란 거야?"

"네! 정서점님! 호박 사주세요!"


호박이라니. 늙은 호박이라니.
사는 것도 문제지만 잡는 것도 문제인데.

"정서점님! 호박 사주세요"라는 말이 귀에 울려 망원 시장 가게 생겼다.

아침이 되면 엄마에게 전화해야겠다.
1인 가구로 오래 살아온 딸이 외롭지 않을까 걱정하는 엄마에게 서점 새식구 이야기를 들려드려야지.

혼자 사는 사람들이 식구를 만들어간다. 서점의 색다른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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