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편지 _ 2021년 11월 19일
물속깊이님, 제가 지난주에 제주 여행에서 글에 썼던, 숙소에 김연수 작가님과 황정은 작가님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는 책장이 있다는 공용 공간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물속깊이님이 거긴 천국인가요, 하셨잖아요. 서울로 돌아오는 날 아침에는 저도 그곳이 천국인가 했습니다. 로즈메리를 넣은 물병에서 나는 은은한 향, 채소구이와 수프와 빵도 맛났는데, 등이 켜진 테이블 옆 작은 창문으로 한라산이 보였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부터 바다 이야기를 할 테니, 물속깊이님은 그 공간을 상상하면서 들어주세요.
숙소는 서귀포 남원읍 바닷가 근처. 숙소에서 5분쯤 걸으면 번화한 동네에 숨어 있는 노포처럼 바다가 나와요. 잘 정비된 올레길 5코스에, 걸음 빠른 사람에게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게. 돌계단을 열다섯 개 정도 내려가면 나오는 바닷가는 돌이 많고 오목한 게 아담했어요. 저는, 예전에 동네 사람들이 바다에 출입했던 옛길이 아닐까 추측했답니다. 그렇다면 포구는 아니니, 해녀들이 다녔을 텐데 해녀들이 쉴 만한 공간은 따로 없었어요. 바람을 맞고 자란 나무 몇 그루도 인상 깊었는데 바다 쪽으로는 가지를 뻗지 못하고 육지 쪽으로 바위를 피해 겨우 자랐지만, 작은 고추가 맵듯이 야물어 보였어요. 나무가 말을 한다면 할 말이 얼마나 많을까 싶었습니다. 바닷가에서 다시 동네로 올라가는 계단 끄트머리에는 노랑 털머위꽃이 많았고, 대나무를 기둥 삼아 나무들이 덩굴을 이루어서 깊은 숲속 같았어요. 작은 공간이었지만, 제게는 메리와 콜린 그리고 디콘이 나오는 동화책 <비밀의 화원> 같은 ‘비밀의 바다’였답니다.
또 다른 바다는 서귀포 남원 위미에 있는 카페 서연의 집에서 만났어요. 바다에 윤슬이 가득한 날이라 눈이 부셔서 새로 산 선글라스를 썼지요. 여행 가기 전, 비 예보가 계속이라 선글라스를 챙길까 말까 하다가 이렇게 사소한 일을 고민하는 게 여행이구나, 그래서 여행이 좋은 것이구나 했죠. 카페에서는 언제나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노래를 틀어요. 중간중간 영화 ‘건축학 개론’ 대사를 섞어서요. 키스에 대한 납득이 대사가 나오면 여러 번 들었어도 또, 웃음이 나온답니다. 맞습니다. 영화 건축학 개론 촬영지예요. 카페 2층 베란다에 서면 바다가 넓은지 하늘이 넓은지 알 수 없을 만큼 눈이 시원한 곳이죠.
그날은 와인잔에 담긴 아이스 카푸치노 덕분에 기분이 한결 좋았는데, 수평선에 있는 섬을 보았습니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가늘고 긴 막대기 모양이었는데, 카페 직원은 ‘지귀도’라고 했습니다.
지귀도에서는 한라산이 잘 보이겠네 하는 생각을 시작으로 한라산이 뭐야 제주도도 다 보이겠네 하다가 제주도가 뭐야 우주가 다 보이겠네, 마치 도미노처럼 생각이 이어지는데, 바다가 얼마나 거대한지 실감 나는 순간에, 순하게 살다가 가볍게 죽어야겠네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물속깊이님, 순하게 살다 가볍게 가더라도 ‘삶의 방식’은 필요하겠지요. 해서 적어주신 김애란 작가님 글은 여러 번 읽었습니다. 내 삶을 보다 좋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것에는 사람을 빼면, 제게는 쓰기, 읽기, 걷기, 그리기, 수영이 있어요. 모두 다 취미 수준이지만, 모두 다 제 삶을 풍요롭게 반듯하게 만들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에 관한 관심도 조금씩 생기는 것을 보면 방향성도 생기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그중 제 삶에 가장 도움 되는 것은 쓰기!!!
쓰기는 수행과 비슷해요. 혼자 해야 하고, 좀처럼 늘지 않아서요. 읽기는 가수 요조 말대로 눈알만 굴리면 되고, 걷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기는 너무 튀면 예술이라 우기면 되고, 수영은 유튜브에서도 배울 수 있는데, 쓰기는 좋은 글에 대한 설명만 들을 뿐 가르침은 없으니까요. 그저 혼자 쓰고 수정을 반복하고 평가를 받는 일이 전부니까요. 아, 수행과 비슷한 점은 또 있습니다. 글감을 이리저리 재보면서 마음을 돌아보고 이 이야기를 써도 되나 안 되나를 점검하고 독자까지 생각하다 보면 머리와 마음을 온통 써야 하니까요. 하긴, 그 정도는 노력해야 삶이 좋은 방향으로 향하겠죠.
그래서 쓰기는 어렵고, 그래서 잘 안 써지는 날도 있고, 그래서 서점님은 쓸 게 없으면 점이라도 찍으라고 하시나 봐요. 그러니까, 물속깊이님. 쓰지 못하는 날이 며칠 계속되는 것은 당연한 일 같습니다. 저는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시간 부자라서, 한번 멈추면 다시 쓰기 어려울 것 같아서 매일 쓴답니다.
<A가 X에게>(존 버거) 때문에 물속깊이님 하면 생각나는 ‘사모해마지 않는 김연수 작가님’에서 ‘사모해마지않는’을 뺏다는 말씀에 웃었어요. 빼도 소용없어요. 그만 일로 서점 리스본 글쓰기 클럽 문우님들은 그럴 생각이 없을 테니까요.
<A가 X에게>는 저도 아직 다 못 읽었어요. 읽다 만 책은 현재, 5층 탑이 됐습니다.
소설(小雪)이 금방인데 단풍이 여태 근사해요. 제주 따라비 오름에서 철쭉 몇 송이가 핀 것을 보고 웃었는데 이웃 아파트에도 철쭉이 서너 송이 피었어요. 철쭉이 뭐 할 말 있나, 좀 궁금하네요. 유자차가 좋은 계절이에요, 물속깊이님. 감기 조심하세요. 2021년 11월 19일. 마롱 드림 ◑◑
덧 :) 제 생일은 지났지만, 11월에 생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는 생일날, 잘살고 있다고 제게 칭찬을 듬뿍하고 망고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덧덧 :) 어때요, 물속깊이님. 상상하며 읽기는 괜찮았나요. 실은 제주 숙소에 있을 때 물속깊이님이 좋아할 공간이라는 생각을 두어 번 했어요. 방이 6개 있는 집이었는데, 물속깊이님이랑 우연히 그곳에서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