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이타주의

by 예솔

타인의 곤란함은 곧 나의 불편함이 된다. 문제는 저쪽에 있고 증상은 이쪽에서 일어난다. 이건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 이전에 일어나는 신체 반응이다. 그 불편함을 해소하려면 상대를 먼저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 평온을 되찾으려면 타인의 곤란함부터 제거해야 하는 이상한 구조다.


그렇게 나의 배려가 시작된다. 이것은 선한 의도가 아니라 생존 전략일 뿐이다. 더 나아가면, 누군가 곤란해질 ”것 같은“ 상황을 보면 아직 그 사람이 느끼지도 않은 감정까지 미리 상상해서 내 마음이 먼저 곤란해지기까지 한다. 사실 상대는 그렇게까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이미 곤란한 상황이 초래한 부정적인 결과까지 겪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 때문에 타인의 불편함을 내가 감수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주위에서 “남들을 그렇게까지 신경쓰거나 배려해줄 필요 없다. 너를 우선으로 생각하라.”는 조언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임을 이해하지 못 한다.


어느 날 책에서 HSP(Highly Sensitive Person)에 대한 글을 봤는데, 내가 딱 그 전형적인 사례였다.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니 왠지 위로가 되었다. 내가 특이하다거나 혹은 오랜 정신 질환에 따른 부정적 영향이 아니라, 세상에 흔한 기질 중 하나를 가졌을 뿐이라는 것이 날 소외감에서 해방시켰다.


기질은 고치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가 없고, 그냥 이해하면 된다. 불편함은 불편하지만 겪는 것이다. 손가락이 짧아 도에서 도까지 동시에 누르기 어려웠던 것처럼. 키가 작아 바짓단이 끌렸던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적성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