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근처 고호재라는 한옥 카페가 있다.
작은 반상 위에 알록달록 예쁜 떡 2-3조각과 약과, 과편, 정과, 그리고 따뜻하고 향긋한 차가 함께 나온다. 그림 같은 비주얼을 보며 동동 떠오르는 설렘은 잠시다. 이내 마음은 그 작은 반상 아래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차 한 모음 마시니 가슴까지 따뜻함이 퍼져 나가는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타고 내려가는 따스함이 요동치고 불편했던 마음의 상념들을 지긋히 눌러주는 것만 같다.
오후 9시도 비슷한 시간이다.
전쟁 같은 저녁 상차림과 주방, 거실, 하루의 주변 정리를 끝내고,
따뜻한 차 한잔을 들고 책상 앞에 탁 앉는 시간.
그 순간의 편안함에 하루의 크고 작았던 파동들이 지긋히 눌러지는 것만 같다.
가족과 이웃, 주변 사람들의 관계에 시달리던 시간과는 결이 다른,
조용하고 고용한 내 하루의 2부가 시작된다.
이 시간에 TV를 켜는 것이 당연한 시절도 있었더랬다.
특히 9시 뉴스는 무슨 국민의 의무라도 되는 냥, 무조건 봐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법은 좀처럼 없다.
곧바로,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드라마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드라마 한 편이 보여주는 인생의 희로애락이란, 얼마나 다채로운지!!!
마치 내 이야기인 듯 온갖 감정을 고스란히 쏟으며 그 시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감동의 물결을 넘나들며 마음을 쏟았건만, 결국은 공허함만이 남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드라마 몇 편 보면 일 년이 금세 간다던데 정말 월화, 수목, 금토 일주일이 순삭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텔레비전을 끊었다.
(‘끊었다’라는 표현이 맞나 잠시 생각해 보지만 더 좋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담배를 끊었어, 슬을 끊었어. 아마도 그런 맥락과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
물론 텔레비전에는 죄가 없다.
그저 자꾸만 커져가는 공허함은 온갖 미디어와 SNS, 드라마 조차도 세상의 소음처럼 느껴지게 했다.
세상일에 관심을 거두니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마음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였을까? 덕분에 나는 '내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게 되었다.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책이 있고, 그림이 있고, 글을 쓰고 몽상을 하는 일들이 있었다.
'책을 읽었으면 실천을 해야지', '뭐라도 남겨야지'라는 숙제 같은 마음도 기꺼이 놓아버린다.
'지금 네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해봐...' 허용되는 시간.
오늘 시간의 스펙트럼은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정성스럽게 끓인 밀크티를 마시며 설렁설렁 힘을 뺀 채 단상을 기록한다.
오후 9시, 그리고 이어지는 2-3시간의 자유.
내 마음을 헤집고 다니며, 하루를 매듭짓고 정리하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다.
오후 9시를 살아가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당신의 시간 스펙트럼 속에서도 <오후 9시>가 빛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