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아가일때부터 호불호가 비교적 명확했다.
음식도 놀이도,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해 죽겠다는듯 온 몸으로 호기심을 표현하는 반짝이는 아이들도 있더만,
내 아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새로운 것을 보아도 좋게 말하면 신중, 덜 좋게 말하면 겁먹고 일단 후퇴.
그렇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영락없이 와락 들이대는 아이.
커가면서 J가 좋아하는 것들은 더 명확해 졌다.
자동차와 책, 과학, 장난같은 실험, 쵸코렛과 사탕, 피자...
이 때부터 엄마인 나의 반응도 명확해진다.
과학이나 수학 비슷한 놀이에 열중할 때면 넘치는 흐뭇함으로 세상 기뻐 아이와 놀아주었지만,
쵸코렛이나 사탕, 피자 등을 찾아 떼를 쓸때면 또 그 놈의 안 되, No의 반응이 휘몰아 쳤다.
나는 과거의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 J와 나를 바라본다.
"엄마, 저 쵸코렛 먹고 싶어요"
이 말을 하는 순간 J의 마음은 어떨까?
쵸코렛을 먹고 싶은 마음을 엄마에게 전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말이지 꼭 먹고 싶다’ ‘엄마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엄마가 사줄까? 그래, 라고 말해 주었으면..’
작은 가슴을 가득 채웠을 설레임과 조마조마함이 이제야 느껴진다.
'엄마가 화내지 말고 웃어주었으면...'
J의 동그란 눈은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흔들리는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J앞에 선 나는 이런 아이의 눈도, 마음도 쳐다보지 않는다.
“쵸코렛은 안 돼, 건강에도 이빨에도 안 좋아, 다른 거 맛있는거 생각해 봐”
툭!
한없이 빛나던 연약한 꽃송이가 속절없이 꺽이는 소리.
조마조마한 마음 감추며 한껏 부풀었을 기대감도 풍선 터지듯 사라졌다.
웃어줄지 모른다 기대했던 엄마는 무참했다.
빛나는 듯 아닌듯 했던 그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기까지 했지만,
엄마인 나는 비장하게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정말 밉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런 일상의 상황들이 무수히도 흘렀을 것이다.
J가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일요일이 싫을 만큼 학교에 가는 것을 즐거워 하며 매일매일 기쁘게 등교했던 J가 어느 순간부터 부쩍 말이 없고 힘이 없이 쇼파에 늘어져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학교 선생님과도 상담하고 J와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평소와 특별한 점을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며칠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냈지만 일주일, 이 주일이 지나도 비슷한 모습에 나는 마음으로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나는 긴급 처방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J야, 요즘 힘이 없어 보인다... 쵸코렛 먹을까? 제일 좋아하잖아...”
‘그래, 쵸코렛 이라면, 벌떡 일어나겠지!’
나는 의기양양하게 선심쓰듯 J를 향해 명랑하게 제안했다.
아니? 이런 짧고도 성의없는 대답이라니...
나의 자신만만한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쵸코렛뿐만이 아니었다.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 한다.
그저 쇼파에 늘어져 잠을 잔다. 마지막 무기도 없다...
어쩌면....
쵸코렛이 문제가 아니겠구나.
나는 그제서야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 라는 동기 자체가 이 작은 아이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구나.
사소해 보이는 욕구였어도 그것들로 인해 이 아이의 작은 세상은 빛나고 있었구나.
중요한 동기 vs 덜 중요한 동기
어른들은 무기력을 느낄 때, 그 무기력이나 우울감을 의식하며 직면할 수 있다.
노력하고 싶지 않아,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둘래, 혹은 왜 이럴까? 이겨내야 하는데, 어떻게 해 볼까? 상담이라도 받아볼까? 운동이라도 해 볼까?
그러나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무기력에, 우울증에 빠져도 그 상태를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인지하지 못하기에 그저 무심히 빠져들어 버린다.
주위의 현명한 부모나 어른이 없다면, 어떤 상태에까지 이르게 될지 모를 일이다.
수학, 과학, 영어...
엄마 눈에 화려해 보이던 이런 것에 대한 관심만이 의미있는 동기가 아니었다.
무엇이라도 좋았다.
작은 것 하나라도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으로부터 아이를 건져낼 수 있는 낚시줄과 같았다.
일상의 작은 바램이라는 것이 이런 낚시줄과 같은 것이다.
쵸코렛을 먹고 싶은거, 물놀이를 하고 싶은거, 자동차를 타고 싶은거, 로봇 장간감을 가지고 싶은거...
모든 것이 소중한 “동기”이다.
아이들의 동기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어른의 눈에는 동기의 종류마다 차별이 있다.
'장래희망'에 관한 동기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라는 동기보다 흐뭇하다.
'성적으로 1등'을 하고 싶다라는 동기는 축구를 잘 하고 싶다는 동기보다 기쁘다.
'책을 사고 싶다'라는 동기는 새 스케이트화를 사고 싶다라는 동기보다 의미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동기는 하고 싶은 순수한 열망과 기쁨이라는 점에서 무엇이 되었든 동일하다.
크건 작건, 무겁건 가볍건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고 에너지이므로 차별없이 소중할 뿐이다.
엄마인 내가 이런 마음으로 J의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더라면, 그의 동기와 호기심이 지금보다 더 강렬했으리라 확신한다. 작더라도 자신의 동기가 지지를 받고 소중한 것이라는 느낌은 어렸을 때일수록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삶을 이끄는 힘
영재교에서 이러한 동기는 학습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열심히 노력하는 태도만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전공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영재교에 입학했다 해서 금방 무언가에 꽂혀서 파고들며 겁나게 집중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진 않는다.
내가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대상을 스스로 열심히 찾아야 한다.
선생님이 알려주는 것도, 정해주는 것도 없다. 교육과정 또한 전공마다 다른 과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학생들마다 다른 학습 루트를 따르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누가 나에게 무언가를 정해 줄 수 있겠는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 내가 가진 '동기'이다.
그저 대충 괜찮을 것 같은 과목을 선택하다보면, 어렵고 힘든 과정을 끝까지 해낼 힘을 가지기 어렵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는 삶.
어른이 되어서도 꿈꾸며 바라는 삶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아이의 동기를 그렇게 쉽고 가볍게 생각했을까?
위험하고, 잘못이며, 치명적으로 위험한 것에 대한 동기였다면, 나의 엄격함과 단호함이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기준과 편협한 생각 속에서 성급히 판단했다.
이들은 잠시 옮겨놓고, 아이의 눈빛과 마음을 먼저 바라봐 주었어야 했다.
나는 아들의 동기만을 꺽은 것이 아니라, 마음마저 꺽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J가 쵸코렛을 매일 먹는건 이도 상하고 건강도 나쁘게 하기 때문에 좋지가 않아.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일주일에 한번쯤 먹도록 하자”
아이의 동기와 건강을 모두 챙길 수 있는 좀 더 어른다운 지혜를 발휘할 수는 없었을까 말이다.
어떤 형식도 좋다.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동기가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생각은 곧 자기 존중감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마음의 용기를 키워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배엄마가 후배 엄마에게>
아이의 눈을 오래 바라봐 주시나요?
2-3초 스치듯 머무르는 시선이 아니고 마음을 읽는, 전하는 '눈맞춤'말이죠.
아들이라는 이유였을까요?
저는 자주 바라보긴 했지만, 긴 눈맞춤을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초등 고학년만 되어도 서로가 조금씩 어색해졌으니까요.
아이가 어리다면 더 없이 좋지만,
초등 고학년, 중학생, 고등학생 이어도 좋아요.
아이의 눈을 깊게 바라보고 마음을 읽어보려 해 보시길 바래요.
눈 속에는 많은 감정이 들어있습니다.
어른이 아닌 아이라면 더욱이요, 내 아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누구보다 엄마는 그걸 잘 읽을 수가 있을 거예요.
부모, 자식간 마음을 나누는 것도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그 눈 속에 담겨있더라구요.
부모의 잔소리는 반감을 일으키지만,
눈맞춤을 통해서 그저 마음이 이해되는 경우도 있어요.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그것이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내 자식을 바라보는 것임에도 생각보다 이게 매우 어색해서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소통의 단계로까지 가지 않는것 같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눈맞춤의 시간과 횟수를 늘려가 보시길 바래요.
아이의 눈은 생각보다 매우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