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가슴이 작다하여
어찌 너의 아픔도 작았을까?

'11살짜리 마음'이란 없다

by 소리

J의 영재교 합격 후, 입학을 앞둔 즈음에 꽤 많은 짐들을 정리했다.


중학교 교과서와 문제집, 그동안 공부했던 프린트물과 필기 노트...

그동안 내 눈엔 늘 부족해 보였던 것과는 달리, 많은 노력의 흔적들 앞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가방도 몇 개씩이다.

학교가방, 학원가방, 보조가방, 신발주머니, 운동가방....


작아진 학교가방과 학원가방들을 정리하는 와중에

버리려던 작은 가방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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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고학년부터 중등 초입까지 매고 다니던 작은 학원가방이다.

작지만 세탁하면 깨끗하게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쓰기에 말이다.

이미 몸집도 마음도 커진 J는 사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세탁소에 맡겨 깨끗이 세탁하고도 며칠을 그대로 방치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배낭의 존재가 생각났다.


그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걸으면서 나는 순간 목이 메어왔다.


이 작은 가방이 너의 어깨를 얼마나 무겁게 했을까?

매일 어깨에 이 가방을 메고 걸으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가방 안에 든 책과 프린트물들이, 주간, 월간 테스트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공부하는 동안 한 번도 힘들다, 어렵다, 싫다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그 과정을 견뎌간 아이처럼

이 작은 가방은 조용히, 묵묵히 그 무게를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또다시 과거의 한 장면 속에서 나와 J를 바라본다.


나는 학원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있다.


“어머님, J가 이번 테스트에서 점수가 많이 안 나왔어요.

레벨업을 못할 정도예요. 잘하던 아이가 무슨 일일까요?”


나는 전화받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인가 했고,

아이에 대한 실망과 분노와 불안으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휘몰아쳤다.

가시방석 같은 심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J에게 갔다.

J는 거실 책상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기척에 고개를 돌려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던 J는 아무 말이 없다.


엄마라는 사람, 나는 그 순간 또 J의 마음을 바라보지 못했다.

아니 J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실망과 불안으로 가득 찬 내 마음만 있을 뿐.


즉시로 또 뼈 있는 멘트를 날렸던 것 같다.

“너 이번에 레벨업을 못한다는데, 어떡할 거니?”


고작 4학년이다. 레벨업이 대체 무슨 대수냐...


J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고 나를 쳐다보지 못했다.

조용한 J를 향해 나는 어쩌면 내 자신에 할 말을 속시원히 내뱉었다.


당시는 J의 열심을 독려하기 위한 말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그 장면 속을 들여다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저 나의 속상한 마음, 버려야 속이 풀릴 것 같아 쏟아내는 감정 쓰레기 같은 말들이었다.


J는 다음 날 색종이에 쪽지를 적어 내 머리맡에 놓아 놓은 걸 발견했다.



'엄마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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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마음이 아파요


더 끔찍했던 장면은

그 쪽지를 보며 나는 그저 약간의 후회를 하는 듯 하나,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수첩 어디엔가 쪽지를 넣어두고 만다.

여전히 어린 J의 마음보다는 내 마음 아픈 것만 중요해 보이는 표정.


나는 나의 과거를 돌이켜 보는 지금에야 그 쪽지가 보인다.

그 쪽지를 보면서 엉엉 소리 내서 대성통곡을 한다.


J야, 엄마가 미안해. 네가 왜.... 무엇이 미안하니...

너의 잘못은, 너의 탓은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에야 온몸과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한다.


J는 그 일이 있은 후 눈 깜 박거림의 증상이 왔다.

며칠간의 현상이었지만, 언제나 반짝이던 깊고 검은 눈동자를 나를 오랫동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에야 깨닫는다.

엄마인 나의 말과 표정과 온몸으로 뿜어내는 실망과 두려움의 에너지가

J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 견디기 힘든 불안이었는지를...


나는 아무리 속상했어도 나를 해할 만큼은 아니었다.

내 머리는 멀쩡했고 내 마음은 어두웠지만 그래도 내 일상이 방해받진 않았다.


그러나 J는 자신의 작은 머리와 마음의 상처가 드러날 만큼 아팠던 것이다.

'엄마 마음이 아파요'

속으로 견뎌내질 못할 정도였기에 눈을 깜박이며 아픔의 사인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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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짜리 마음'이란 없다


그 시기 수학학원 레벨업이 J 본인에게도 그렇게 중요했을까?

아니다, 나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레벨업의 실패보다 아들에게는 단연코 엄마가 느끼는 실망감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아마도 엄마를 실망시킨 자기를 자책했는지도 모른다.

그 자책이 J의 뇌와 무의식을 뒤흔들 만큼 컸던 것이다.


고작 11살짜리가 받는 상처가 얼마나 크겠어,

며칠 지나면 또 잊어버리고 말겠지.


'11살짜리 마음'이기에 그 슬픔도 '11살짜리 만큼' 이려니...


참을 수 없는 가볍고도 얇은 내 마음의 깊이가,

이런 나의 착각이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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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접어두고.


J의 작은 책가방을 나는 아직도 매고 다닌다.

그 작은 어깨 위를 누르던 10살, 11살 인생의 무게를 잊지 않기 위해서,

J의 작은 가슴이 느꼈을 그 깊고도 아픈 상처를 기억하기 위해서...


지금도 J는 내가 모르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고등학생이 그 정도 고생은 당연한 거지,

그 정도 힘든 건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면 다 하는 거지,

영재교 다니는데 쉽게 공부하려고 하니?...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책망과 가벼운 생각으로 J의 마음을 넘겨짚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J의 마음이, 어깨가 어른보다 크지 않다 하여 그의 아픔과 상처 또한 작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픈 만큼의 정도로 그도 아플 것이고,

내 불안의 크기만큼이나 그의 가슴도 불안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여, 오늘도 나는 내 마음을 접어둔다.

진심을 다해 그의 마음을 먼저 바라보려 애쓴다.








< 선배엄마가 후배 엄마에게 >


'10살 아이의 생각이 뻔하지, 뭐'

'애들은 원래 그렇잖아'

'고등학생이 그 정도 고생은 당연하지'

'엄마가 살아보니 그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더라'


돌이켜보니 내 아이에 관해서라 할지라도

뻔한 것, 원래 그런 것, 당연한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 것 같았어요.


80세, 90세 된 어른이

저희의 아픈 상처에 대해 저리 말한 다면 우리 마음은 어떨까요?

우리보다 30-40년이나 더 살아오신 그분의 세월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 인생의 무게에 충분히 진지하잖아요.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우리 아이들도 몇 살이든 상관없이,

자기 인생의 무게를 나름 진지하게 느끼며 살고 있는 거죠.


나의 잣대와 내가 살아온 세월에 비추어

그것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하려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내 아이의 아픔의 크기가, 진심이 무엇에 가까운 지가 좀 더 선명해질 것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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