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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은 다른 것일까요?

냉정과 열정 사이

by 소리


<오필리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물 속에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니 잠든 듯 평온해 보입니다.

숲 속에 만개한 꽃들도 아름답게 느껴지구요.


그런데 이 그림은 오필리아라는 여인이 물 속에서 빠져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필리아는 세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인데, 사랑했던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물 속에서 빠진 채 그저 죽음에 자신의 몸을 맡겨 버리는 비극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출처:<요즘 어른들을 위한 최소한의 미술 100>, 이은화 지음


아름다운 여인의 평화로움과 죽음의 공포가 이 1m 남짓한 화폭 안에 동시에 담겨있다는 사실에 저는 갑자기 숨이 막힐 듯 답답해졌습니다.


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낯선 감정이 주는 긴장감이 너무 팽팽해서, 화폭 어딘가에 구멍을 뜷어 시원한 공기라도 마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오래 숨을 참았던 것처럼 후아~하는 기분으로 그림에서 빠져나와 텍스트로 시선을 옮겼을 때, 전혀 다른 감상 포인트를 발견한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정말이지 숨쉴 구멍을 발견한 듯 했습니다.



야외에서 매일 11시간씩 다섯달 동안 자연을 직접 관찰하며 그렸다.
6월에 시작한 작업은 11월에 마무리 되었다.



이 그림 한장을 완성하기 위해서 화가는 무려 하루에 11시간씩, 5달 동안이나 매달렸다는 사실, 이 사실이 그림으로부터 오는 두려움과 긴장감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아, 진짜 몰입은 이런 행동이구나',

'내 몰입은 뭐였지? 하루 10시간이라도 무언가에 미친듯이 빠져 보았던... ?'


온갖 자기계발서마다 등장하니 오히려 시큰둥해져 버린 "몰입"이라는 단어가 짧지만 강하게 가슴에 훅~ 들어오는 순간이었습니다. 밀레이의 열정은 냄비 끓듯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마음이 아니라, 냉정하고도 단단한 그래서 쉽게 식어버리지 않는 마음이었다고,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반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는 그 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35일만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무려 8m나 되는 큰 그림인데 말입니다.


피카소가 이 그릠을 그리게 된 계기는 그의 고국 스페인의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가 나치의 폭격을 받아 1,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원래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매우 빠른 화가였지만, 조국의 비극 앞에서 그의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게르니카>를 본 나치 장교에게 피카소가 한 말은 그림 만큼이나 유명하지요.


" 이 그림은 당신이 그린 것이요?"
피카소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당신들이 한 것이요"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미술 100>, p.21






매일 11시간씩 5개월에 걸쳐 완성한 밀레이의 1m 남짓한 그림과 35일만에 완성한 피카소의 8m 그림...

그들 사이에서 나는 냉정과 열정의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밀레이의 뜨거운 마음이 피카소의 열정과 같은 성질의 것이었다면, 그는 아마 5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같은 장소, 같은 배경에서 <오필리아>를 완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숨에 완성하고픈 마음을 꾹꾹 누르며 정확하고 냉정하게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고,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피카소 또한 나치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의 마음으로만 그림을 그렸다면, <게르니카>는 아마도 정치적인 선동 메세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울부짖는 동물둘, 칼을 쥔 채 쓰러진 병사의 모습 등을 거침없이 그리면서 인간의 존엄에 대해 냉정하고 엄중한 질문을 던집니다.




"열정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어"

저는 이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열정만으로 뭐든 할 수 있는 건 아니야."라고 차라리 말할 것 같습니다.


"열정은 뜨겁고 강하게 불타오르지만, 주변을 금새 다 태워버리기도 해.

다 태우고 나면 재만 남더라. 끝내 허망한...

허망한 재로 남지 않으려면, 열정의 무게를 견디는 냉정함이 필요하더라.

그러니까 열정으로 미래를 보고, 냉정함으로 현재를 보는 거야. 그럼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라고 차라리 말해 줄 것 같습니다.

두 그림이 주는 울림을 따라 사유의 끝까지 와보니 이제야 알겠습니다.

결국 열정과 냉정은 다른지 않음을, 충돌하지 않는 마음임을 알겠습니다.

열정의 무게를 견디는 것은 열정이 내면에 숨기고 있는 냉정함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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