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아들 J를 키우면서 나는 그 작은 아이를 완전체로 바라보질 못했다.
나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한 존재.
그래서 소중했고, 최선을 다해 그의 모든 것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해 주는 부모가 되어야 했다.
그 책임을 온전히 완수했을 때, 아니 완수했다고 느꼈을 때에야 만족했고
조금의 휴식을 얻은 듯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학생은 완전한 인격체이며 자기만의 성장 속도를 가지므로....’
교육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 따위는 적어도 나와 아들의 세상에는 없었다.
다시금 J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마치 전지적 작가시점인 양 나와 아들의 성향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글을 써 볼 것 같다.
글이 어렵다면 요약식 비교 목록이라도 좋다.
벤다이어그램으로 아들과 나의 교집합, 합집합의 관계라도 그려보겠다.
어떤 방법이든 그런 시도에는 나 자신을 아들과 떼어놓고 보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이므로.
그를 통해서 나와 J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최선은 엄마의 몫일뿐,
J는 느리고 게을러 보였다.
친구들의 소식과 경쟁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최고로 잘해야지 욕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아직은 어리니까... 하지만 중고등학생이 되면 다르지.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잘 보내려면 시간관리, 공부습관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그런 J의 생활방식을 바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소위 전교권 학생이지 않았나.
시험날짜가 발표될 때의 그 긴장감, 계획을 짜고 그날 하루 목표를 달성하는 그 과정에서
내 존재감이 돋보이는 것에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철저함에 관해서라면, 나름 자신만만했다.
매일 아침마다 5분 학습, 취침과 기상 시간 조절, 복습과 예습 시간 분배,
오답노트 작성해 보기, 노트 정리 등등
나는 나의 이런 성공스토리를 아들도 적극 활용해 주기를 바랐다.
J는 게으르지만 성실한 타입이었으므로 나름 열심히 따라 해 가는 듯했다.
이런 경험이 아들의 학습습관이 되리라 기대하며 그에게도 효과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J는 딱 여기까지.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만 성실히 그 방법을 따랐을 뿐,
내가 한 발 물러나있으면 그도 어느새 저만큼이나 빠져나와 있었다.
보지 못하는 눈
결국 J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자신만만했던 계획과 학습방법들은 아들에게는 그저 한번 쓰고 버려도 좋을 일회용품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나와 J의 동상이몽.
그 마지막 엔딩은 서로에게 가하는 마음의 상처였다.
그 끝에서 나는 또다시 내 마음속의 불안과 분노와 싸우는 나와의 전쟁을 이어가야 했다.
아들을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과 싸웠다.
나름 내가 모범생으로 터득했던 비법들을 가르쳐주려고 애썼건만...
내가 공들여 만든 실천 방법들을 자기 것으로 해보려는 작은 시도조차 스스로 해 보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이제 네가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다.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덮어가며
때로는 사이좋게, 때로는 다투며 일상을 이어갔다.
엄마이자 나로 살기
내 속의 불안과 두려움, 분노를 마주하기조차 힘들어진 나는 느닷없이 그림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가 아들의 나이 즈음에 품었던, 그러나 꺼내지 못하고 숨겼던 꿈을 들춰낸 이유가.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 슥슥 스케치 위에서 들리는 연필질.
신기하게도 나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연필의 흔적과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소도.
하필이면 왜 소도였나? 케렌시아 같은 멋진 단어도 있는데...
나는 삼국시대 죄인이 도망가도 벌하지 못했다는 그 이상하고도 신기했던 치외법권의 영역을 떠올렸다.
J를 포기해 버린 듯한 내 죄책감을 숨길 곳에 필요했을까?...
그림 그리는 시간은 그렇게 내 삶의 소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림을 통해 나를 오롯이 나로만 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는 J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상한 과정이었다.
아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자 그의 생각, 태도, 감정, 일상을 탐색하던 그 시선을 거두니,
오히려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J라는 ‘인격’이 보였다.
(인격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내기까지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뭔가 독립적이고 독특한, 고유하게 빛나는 그의 것으로 가득 찬 영혼 같은 이 느낌을 어찌 표현할지 몰라 ‘인격’이라는 단어를 써 본다.
영상 되돌리기를 하듯 중학생, 초등학생, 유치원생, 유아, 아기였던 아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는데,
더 이상 연약해 보이기지 않았다.
여전히 완전체는 아니지만, 혼자도 애쓰는 모습, 땀을 흘리며 열중하던 모습, 넘어져도 일어나 걷던 모습...
아들이 뭔가 해 내려했던 순간들이 보였다.
얼마나 독립적인지, 얼마나 고유한 그만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도...
내 관점에서 훌륭한 비법들이 J에게 일회용품 같았던 이유는 J는 나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라 하여 모든 사람에게 다 어울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간단하고 명확한 논리를 왜 나는 못 보았을까?
아들에게서 또 다른 나를 투영하고, 그의 성취를 내 성과로 여겼던 그 집착에서
내가 좀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었더라면,
아들은 지금보다 더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며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이자 나’로 살기.
내가 나로 살고자 할 때, 나는 J에게서 나를 떼어내고 온전히 독립된 그의 인격을 볼 수 있었고,
볼 수 있었기에 인정할 수 있었다.
너는 너, 나는 나로 거리두기.
그래, 우리의 가장 좋은 관계는 ‘거리두기’에서 비롯되었다.
나와 가장 가깝기를 갈망했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와 오래 행복하기 위한 방법이 ‘거리두기’라니.
이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깨달음이 귀하고 귀하다.
<선배엄마가 후배엄마에게>
영재교에서 생활하는 아들을 보면서 변함없이 확신하는 바가 있습니다.
모든 선행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주도성"을 기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스스로 학습에 대한 내적동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깊이 있는 지식과 다양한 활동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쉽게 지쳐버릴 것입니다.
아이의 자기 주도성을 기르는 데에는 때로 '엄마의 최선'이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보통 엄마가 최선을 다할 때면, 엄마의 생각과 신념이 아이에게 강하려 투입되곤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동기를 찾아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허용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아이가 주도적으로 하도록 하면 자기 주도성이 길러질까요?
저의 경우를 돌이켜 보면, 부모가 할 수 있는 더 중요한 것은 실패의 경험을 관리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한 행동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도 좌절을 하게 되죠.
문제는 그다음 벌어지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실패한 자신을 책망하고 용기가 꺾여버릴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행동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아이의 자기 주도성은 바로 이 단계에서 길러집니다.
자신의 결과를 '실패'로 이름 붙이지 않고,
더 좋은 결과를 위해 한 발 더 나아가려 결심하는 그 마음이 자기 주도성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기에 망설이게 됩니다.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죠.
아이가 엄마의 기준에 못 미치거나, 실패했다 스스로 느낄 때에
그것을 오히려 좋은 기회로 보아주세요.
그 실패의 경험이 긍정적인 자기 신뢰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엄마의 최선은 바로 이 타이밍에 발휘되어야 할 것입니다.